▲ 이재명 논설위원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불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접시꽃 당신’ 일부(도종환)

6월은 접시꽃의 계절이다. 마치 옥수수대와 키재기를 하듯 키를 우뚝 세운 접시꽃은 6월 초입의 상징이다. 이내 장마가 시작되면 담장 안팎으로, 골목 모퉁이로 접시꽃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옥수수는 여물고 여름의 한 가운데로 난 길 옆에는 인생의 접시꽃이 삶을 한 가득 내놓을 것이다. ‘접시꽃 당신’은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등진 아내를 그리며 쓴 도종환의 시다. 1986년 출간된 이 시집은 당시 15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요즘말로 밀리언셀러다. 당시 ‘접시꽃 당신’은 우리나라를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영화가 나오고 시낭송집이 불티나게 팔렸다.

접시꽃은 꽃의 모양이 접시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렇게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촉규화(蜀葵花)·덕두화·접중화·촉규·촉계화·단오금이라고도 불렸다. 전남 화순군은 2021년까지 4년에 걸쳐 화순읍 관문인 이십곡리, 화순 전남대병원 진입로 등 18곳 약 12㎞에 접시꽃 거리를 조성한다고 한다.

최치원은 접시꽃을 소재로 ‘촉규화(蜀葵花)’라는 시를 썼다. 부산의 동백섬에 가면 최치원의 한시비가 있다.

▲ 접시꽃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 약한 가지를 누르네./ 매화비 개니 향기 날리고/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린다./ 수레 탄 사람 뉘라서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기웃거리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 스스로 부끄러워/ 남에게서 버림받고도 그 한을 견디누나.

최치원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한탄을 담았다. 거친 밭 쓸쓸한 곳에 아무리 흐드러지게 피어도 누구하나 보아주지 않는 접시꽃. 6두품의 서러움을 그대로 시에 담았다.

접시꽃은 뿌리 가까운 아래쪽부터 핀다. 그리고는 2m 이상 자라면서 줄기를 돌아가 인생의 정수리까지 핀다. 눈을 아찔하게 했던 화려했던 봄꽃들도 쓰러지고 이제는 귓전을 아스라히 감도는 풀벌레소리와 밤이슬 내리는 소리, 후두둑후두둑 옥수수 잎을 때리는 여름비의 둔탁한 소리…계절의 변화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아련한 한을 남긴다.

여름 땡볕 아래로 접시꽃이 인생의 골목길을 돌아간다. 아내를 묻고 돌아선 도종환과 골품제의 뼈를 묻은 최치원은 접시꽃에서 또 한 세상의 모퉁이를 돌아선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내린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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