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늘어도 어른이 보이지 않는 시대
대접받기 집착하는 권위적 어른은 안돼
진정 책임을 질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

▲ 곽해용 국회 비상계획관(이사관)

‘어쩌다 어른’이 된 어른들이 참 많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했고 결혼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결혼을 했다. 부모가 되는 법도 제대로 익숙하지 않은 채 덜컹 부모가 되었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성인으로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뜻하며 민법상 만 19세 이상을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나 어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결혼해서 애를 낳아보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책임의 무게가 크다. 심지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김난도 교수는 말했다. 물론 어른이라고 모든 면에서 잘할 수는 없다.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칙도 없다. 그러나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면 응당 어른이 해야 한다. 그 역할조차 버겁다면 아직도 진정한 어른 준비가 덜 된 것이리라.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있다. 이를 제작한 팀은 ‘이 세상에 계획하고 어른이 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반절 가까이 달려온 어른들에게 남은 절반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생각할 시간을 주고자’ 기획했다고 한다. 난생처음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면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이해하고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는 살아갈수록 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는 제작팀의 말에 공감한다.

경험이 많을수록 착시와 착각의 확률이 오히려 높기 때문에 실제로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40세는 불혹(不惑)이요 50세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수명 60세 시대에 살던 공자는 힘주어 주장했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어른들은 아직도 때로 더 쉽게 흔들리고 배워야 할 새로운 것들도 지천에 넘쳐난다.

필자도 군 생활 30년여 년 동안 어쩌다 어른 역할을 하다가 지금은 또다시 사회 초년병으로 새로 출발하고 있다. 30세에 아무리 이립(而立)을 했어도 60세에 이순(耳順) 조차 어려운 시대이니 계속 정진해야 할 듯싶다. 이제부터는 과거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의 자세가 더욱 필요할 것 같다. 어떤 날은 공자의 지천명(知天命) 같은 통찰력으로, 어떤 날은 나이 먹어 주눅들은 길고양이 눈망울 같은 불안과 피곤이 찾아와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식지 않는 열정을 품은 어른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그래도 어른이니까.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오시면 막걸리 한 사발 놓고 술상머리에서 몇 시간이고 반복되는 훈계를 듣던 부모세대나 그 시절 할아버지는 그래도 일찍 어른 행세를 하셨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어른들은 최근 폐지 논란에 놓인 민법 제915조 친권자의 징계권에 명시된 ‘친권자는 보호 또는 교양을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라는 가정 체벌규정을 핑계 삼아 좋은 시절에 어른 행세를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어른들도 많아 보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권위도 인정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인들은 늘어나는데 어른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위기에 놓인 우리 정치상황을 그때그때 현명하게 해결해주는 큰 어른들도, 고성과 삿대질이 아니라 넉넉한 경험으로 젊은이들을 이끌어주는 점잖은 어른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달라진 시대의 변화다.

필자 또한 ‘어쩌다 어른’이 되어 인생 귀로의 한 모퉁이에서 하릴없이 서성이지만, 권위적이고 대접받기에만 집착하는 그렇고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 배금(拜金) 주의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이 혼란스러운 사회에서도 필자를 포함한 ‘어쩌다 어른’이 된 외로운 이들에게 ‘비로소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우리 모두의 따뜻하고 힘찬 격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곽해용 국회 비상계획관(이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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