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대옥 무거중학교 교사

“병찬(가명)이가 오늘도 지각했어. 선생님이 지각 한 건당 10분씩 등교시간 당긴다고 했지? 두 번째 지각이니까 내일은 8시까지 등교다.” “네? 김병찬 때문에 망했어!” 하는 아이들의 원망은 종례와 함께 묻혔다. 기어이 다음날 8시까지 등교를 시켰다.

그 때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많다. 단체 벌청소, 단체기합 같은 것들이 남학생 중학교에서 학생지도라는 이름으로 심심찮게 이루어졌다. 스물넷, 갓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그때의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능숙(?)하게 단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단체벌은 학생들의 공동체의식 함양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16년이 지났다. 수업시간마다 토론학습실에 늦게 들어오는 학생이 있다. 쉬는 시간 아이를 불러 이야기를 나눠보니, 앞 시간 교과가 체육인데, 물을 마시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항상 마지막에 마시게 되어서 늦는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다른 친구들 보다 한참이나 늦는다고 했더니, 아토피가 있어서 자기는 꼭 옷을 먼저 갈아입고 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옷만 갈아입고, 일단 제시간에 토론학습실에 오면, 수업 시작하더라도 교실 앞 정수기에 물을 마시러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이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고, 수업시간에 늦지 않게 들어오고 있다. 다른 친구들도 물을 마시러 나가느라 수업시간 앞에 다소 소란스러운 면도 생겼다. 그래서 1명씩 순서대로 조용히 뒷문으로 나갔다 오기로 했다. 종이 치면 일제히 수업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이들의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억지로 시간 안에 오게 해서 ‘타는 목마름으로’ 수업을 듣게 한들 아이가 국어수업을 즐겁게 받아들이겠는가?

아이들 한 명, 한 명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을 지도할 때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규시절 ‘나를 참고, 공동체의 틀에 맞추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이 개인의 다름을 부정하거나 제한하던 시대는 지났다. 오늘날의 공동체는 다양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자신의 다름을 별처럼 빛내는 우주여야 한다. 무한히 흩어져 있는 것 같지만 또 각자의 인력으로 서로를 당기는 공간. 교실이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학생이니까’하며 제한 받던 것들이, ‘사람이니까’ 할 수 있게 허용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 수업시간에 질문이 있어 손을 들어 선생님을 찾는 데, 아이의 귀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작년까지도 잔소리하고 제한하던 것이니 자연스레 눈이 찾아냈다. 하지만 귀걸이를 보여주려고 교사를 부른 것이 아니다. 학습 활동 중에 모르는 것이 있어서 선생님을 찾았는데, 복장에 대해 지적하면 혼날까봐 다시는 손을 들어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애써 눈을 돌려 아이와 눈을 맞추면서 답을 함께 찾아본다. ‘아!’ 하는 빛이 떠오르고 아이는 다시 눈을 돌려 본인의 과제에 집중한다.

쉽지는 않다. 개인의 지각을 단체 벌칙으로 지도하며 아이들의 원망은 듣지 않던 귀를, 아이들 저 마다의 이야기를 듣는 귀로 바꾸는 일도, 생활지도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규제를 위한 규제에 최적화된 눈을, 아이들의 눈빛을 살피는 눈으로 바꾸는 일도 어렵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하듯 교사도 변화하고 있다. 아니 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강대옥 무거중학교 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