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료현실·외국 선진사례 검토없이
인권보호의 善意만 믿고 도입한 탈원화
정작 중증 정신질환자의 적기치료 막아

▲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조현병으로 진단받고 10년째 진료중인 환자가 외래를 방문했다. “요즘 사람들 눈길을 자꾸 피하게 돼요. 뉴스기사에서 위험한 환자를 잡아가두라는 댓글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예전에는 가까운 사람에겐 나의 질환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될 줄 몰랐어요.”

병원 식당에서 만난 보호자가 걱정스레 물어본다. “우리 아들은 아무 증상 없이 5년째 회사 생활을 잘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니 조현병 환자를 전수조사 한다고 하고, 강제로 등록시킨다고 하데요. 멀쩡히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데 행여 불이익을 받을까봐 너무 걱정돼요.”

몇 년 전 입원치료 후 꾸준히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도 묻는다. “저는 처음엔 억지로 입원했지만, 그 때 얼마나 황당한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늦지 않게 입원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에요. 그런데 요즘 환자들은 왜 저처럼 아플 때 치료받지 못하고 큰 사건을 저지르는 거죠?”

중증 정신질환자의 범죄는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지만, 제일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은 현재 진료 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불행을 초래한 법과 제도는 원래 정신질환자의 낙인을 없애고 인권을 보호한다는 선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탈원화(脫院化), 즉 환자가 입원시설을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선한 의도니까 마구 밀어붙여도 된다는 자만심과 과시 욕구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평소 간담회나 공청회에 가보면 정치인들이 의견을 경청하기보다 선한 의도를 홍보하러 온 것만 같다. 얼마나 바쁜지 인사하고 명함 돌리고 축사하고는 곧바로 자리를 뜨기 일쑤다. 탈원화를 위한 법률도 환자를 돕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단지 우리 의료 현실에 무지했고, 선진국 사례를 검토하지 않았을 뿐이다.

선진국에서 탈원화는 60~70년대에 급속히 진행되었다. 1950년대에 항정신병 약물이 개발되어서 많은 환자들이 병원을 나와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인권의식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탈원화의 결과는 나라마다 달랐다. 미국은 1990년대부터 지나친 탈원화의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정신병원 병상이 부족하여 환자는 응급실에 장시간 대기하고, 입원하더라도 충분한 기간 치료할 수 없다. 죄수와 노숙자 중에 중증 정신질환자의 비율이 20~30%로 부쩍 늘었다. 2012년 미국의 중증 정신질환자는 주립 정신병원에 3만5000 명이 있는데 교도소에는 35만여 명으로 10배나 되었다. 병원에서의 탈원화가 교도소에 재시설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신병원은 뒤늦게 1990년대에 늘기 시작했다. 당시 수용소나 기도원에 있던 만성 환자들을 최소한의 시설과 인력으로 설립된 정신병원이 받아들였다. 병상은 늘었지만 의료는 열악하다. 탈원화를 하려면 의료 수준을 높이고 재활시설을 확충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입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치료가 필요하더라도 위험한 상황이 닥쳐야 입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선진국 중에도 오래전에 그런 기준을 채택한 나라가 있다. 미국은 1970년대에 강제입원 기준으로 치료 필요성 대신에 위험성 기준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 기준의 부작용이 드러나자 판사도 의사도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치료 필요성을 적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입원 기준을 치료 필요성으로 바꾸는 주도 늘었다. 2004년 미국의 평균 살인율은 10만 명당 4.51건이었는데, 치료 필요성 기준을 채택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1.42건이 적었다. 이런 현실을 잘 아는 미국의 민간단체인 정신장애연대(NAMI)는 오래전부터 치료 필요성 기준을 지지해왔다.

탈원화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 이탈리아도 위험성 기준은 환자를 위험하다고 낙인찍는다며 치료 필요성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최근에 조현병 환자의 고속도로 역주행 사건이 발생한 뒤 정부는 정신질환자 등록을 강화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등록과 사례 관리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고 지나치면 인권침해의 우려도 있다. 환자의 치료를 가로막는 현행법의 개정이 시급하다.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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