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맑은 날,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천왕봉 오르는 그 길에 법계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 아래 첫 절이다. 태양빛이 쨍한 초여름, 1시간 40여 분을 올라 숨을 가쁘게 토해 낼 때쯤 일주문에 닿는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 세운 절이니 오랜 역사를 지닌 고찰이다. 한국전쟁으로 불타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 근래에 중창 불사를 했다. 법계사가 그 맥을 이어 온 것은 보물 제437호인 삼층석탑이 있기 때문이다.

법계사가 1450m, 그 위에 다시 거대한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우뚝 서 있는 삼층석탑은 홀로 의젓하다. 2.5m라는 탑의 높이는 그래서 무의미하다. 고려 양식의 삼층석탑은 간소하다. 몸돌 모서리에 우주를 넓게 새긴 것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지붕돌은 두터워 처마도 날렵하지 않다. 그러나 천왕봉에서 내려온 구름이 절집을 감싸자 탑은 사뿐하게 아름답다. 법계(法界), 바로 이곳이 천상이다. 탑을 우러러 보살이 아까부터 기도를 하고 있다. 무슨 간구한 기원이 있는지 구부정한 등이 애틋하다. 잠시 합장을 하는데 탑 꼭대기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산신각 앞에 서면 멀리 지리산 능선들이 유장하게 펼쳐지고 그것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은 더 빛난다. 산신각에는 할머니 산신이 호랑이를 거느리고 중앙에 앉아 계신다. 아하, 지리 산신령 마고할매다.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표정도 온후하다. 귀도 부처님을 닮아 아주 크다. 이 세상의 온갖 얘기를 다 들어 줄 것 같다. 그래서 불자들이 산신기도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이고 지고 어머니 산인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다.

▲ 법계사 삼층석탑.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켜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그 깊은 의미를 빌어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를 법계사 삼층석탑 앞에 서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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