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통째로 삶은/ 하얀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는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감자의 맛’전문(이해인)

지난 22일은 하지(夏至)였다. 동지(冬至)가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면 하지는 낮이 가장 긴 날이다. 하지의 낮 시간은 무려 14시간 35분이나 된다. 하지를 정점으로 중천에 머물러 있던 태양이 이윽고 동지를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조만간 매미들이 조용한 시골에 하루종일 심포니를 들려준다.

하지를 지나면 장마가 찾아든다. 울산은 오는 26일 첫 장맛비가 시작돼 일주일 동안 연일 비가 내릴 예정이다.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는 속담은 장마철의 기후를 잘 말해 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24절기를 절기마다 5일씩 끊어 3후(候:기후)로 나눴는데, 하지의 경우 초후(初候)에는 사슴이 뿔을 갈고, 차후(次候)에는 매미가 울기 시작하며, 말후(末候)에는 반하(半夏:끼무릇·소천남성·법반하라고도 부름)의 알이 생긴다고 했다.

이 가운데 굵고 토실한 감자를 캐는 일은 이 즈음의 복된 일이었다. 피눈물 나는 보리고개를 넘어 감자를 캐는 기쁨은 그 어느 수확보다 깊고 심오하다. ‘하짓날은 감자 캐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라는 속담이 오죽하면 만들어졌겠는가. 하지였던 지난 22일 충북 괴산군 감물면에서는 감자축제가 열렸다. 옹심이, 감자떡, 통감자구이, 감자전 등에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 삶은 감자

‘천신(薦新)’이라는 말은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직(社稷)이나 조상에게 올리는(薦) 의식을 뜻한다. 밀 천신, 배 천신, 햇밥천신, 참외 천신, 청어 천신, 조기 천신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 중 ‘감자천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짓날 조상이나 사직에 감자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감자는 논두렁에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어머니가 뒷곁 백철솥에 삶아 광주리에 담아 이고 온 감자를 젓가락으로 푹 찔러 입으로 가져오면 온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비오는 주말 오후 마당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통감자에 젓가락 푹 찔러 한 입 베어먹고 싶다. 이해인 수녀님처럼 하얀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는 날을 고대하며.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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