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째로 삶은/ 하얀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네// 고구마처럼/ 달지도 않고/ 호박이나 가지처럼/ 무르지도 않으면서// 싱겁지는 않은/ 담담하고 차분한/ 중용의 맛// 화가 날 때는/ 감자를 먹으면서/ 모난 마음을 달래야겠다…
‘감자의 맛’전문(이해인)
지난 22일은 하지(夏至)였다. 동지(冬至)가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면 하지는 낮이 가장 긴 날이다. 하지의 낮 시간은 무려 14시간 35분이나 된다. 하지를 정점으로 중천에 머물러 있던 태양이 이윽고 동지를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조만간 매미들이 조용한 시골에 하루종일 심포니를 들려준다.
하지를 지나면 장마가 찾아든다. 울산은 오는 26일 첫 장맛비가 시작돼 일주일 동안 연일 비가 내릴 예정이다.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는 속담은 장마철의 기후를 잘 말해 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24절기를 절기마다 5일씩 끊어 3후(候:기후)로 나눴는데, 하지의 경우 초후(初候)에는 사슴이 뿔을 갈고, 차후(次候)에는 매미가 울기 시작하며, 말후(末候)에는 반하(半夏:끼무릇·소천남성·법반하라고도 부름)의 알이 생긴다고 했다.
이 가운데 굵고 토실한 감자를 캐는 일은 이 즈음의 복된 일이었다. 피눈물 나는 보리고개를 넘어 감자를 캐는 기쁨은 그 어느 수확보다 깊고 심오하다. ‘하짓날은 감자 캐먹는 날이고 보리 환갑이다’라는 속담이 오죽하면 만들어졌겠는가. 하지였던 지난 22일 충북 괴산군 감물면에서는 감자축제가 열렸다. 옹심이, 감자떡, 통감자구이, 감자전 등에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천신(薦新)’이라는 말은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직(社稷)이나 조상에게 올리는(薦) 의식을 뜻한다. 밀 천신, 배 천신, 햇밥천신, 참외 천신, 청어 천신, 조기 천신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 중 ‘감자천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짓날 조상이나 사직에 감자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감자는 논두렁에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어머니가 뒷곁 백철솥에 삶아 광주리에 담아 이고 온 감자를 젓가락으로 푹 찔러 입으로 가져오면 온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니 비오는 주말 오후 마당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통감자에 젓가락 푹 찔러 한 입 베어먹고 싶다. 이해인 수녀님처럼 하얀감자를 한 개만 먹어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넉넉해지는 날을 고대하며. 이재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