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채은 임란의병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울산광역시 북구 대안4길(대안동)의 함월산 골짜기에 있는 신흥사(新興寺, 전통사찰 제4호)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서기 635년(신라 선덕여왕 4) 명랑조사(明朗祖師)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와 같은 불경을 소리 내어 읽으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비법)으로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건흥사(建興寺)로 일컬었다.

이처럼 창건 때부터 호국도량의 성격을 띤 신흥사는 신라가 외침(外侵)에 대비해 만리성을 쌓는 동안 승병(僧兵)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등 울산지역 승병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국 최초로 승병이 봉기해 북구 기박산성 의진(義陣)에 참가하고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국태민안을 위해 안팎으로 노력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다가 1646년(조선 인조 24)에 경상좌병사 이급(李伋)이 축언, 축화 두 승려에게 고쳐 짓도록 하여 다시 세워 ‘신흥사’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13일 왜의 침략(임진왜란)으로 강토(疆土)가 풍전등화처럼 나락으로 떨어질 즈음, 울산 기박산성에서는 대장 박봉수(朴鳳壽)를 비롯한 우국지사 10인이 창의거병하고 모여든 300여 인으로 편대·결진하였다. 그날이 지금으로부터 427년 전인 1592년 4월23일(양 6월2일)이다. 이틀 뒤(4월25일)에는 무려 1000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한다. 12일 뒤인 5월5일엔 경주 의사 견천지와 류백춘, 류정 등이 500여의 의병을 이끌고 와서 합진(合陣)하였다. 이렇게 모여든 울산 의병들은 왜적에게 빼앗긴 경상좌병영성을 5월7일 밤에 기습작전을 펼쳐 많은 병장기 노획과 왜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5월15일에는 앞서 설명했던 신흥사의 주지 지운(智雲) 스님이 승병 100여 명을 이끌고 절 양식 300섬(石)도 함께 실어 와서 기박산성 의진에 합류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이때 실어온 절 양식(糧食) 300섬은 의병들이 먹을 수 있는 약 한 달분의 군량미(軍糧米)이었다 한다.

7년간의 왜란이 끝나고 구국의 선봉에서 싸웠던 선열들의 숭고한 충의정신을 기리고자 전국 각지에서는 사당을 지어 추모제향의 봉행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 울산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2000년부터는 전국 최대의 임란의사 추모 사당인 충의사를 건립하여 봄·가을 두 차례의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처음에는 214위의 위패를 모시고 봉향했으나 2016년부터는 242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기박산성에서 의병의 편대·결진에 참여했던 의병장들은 모두가 충의사에 배향되어 있으나 정작 신흥사 주지 지운스님은 배향되어 있지 않다. 단지, 2000년 4월23일 북구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관한 ‘기박산성 의병제’를 시작으로 올해(2019) 4월23일에 치러진 북구문화원 주관의 제20회 ‘기박산성 임란의병추모제’에서만 당시에 편대·결진한 의병장들과 함께 봉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단일 창의가 아니고 의진(義陣)에 부진(赴陣)해서 그랬을까. 게다가 군량미까지 가지고 왔는데도…. 전국 최초의 승병 창의(倡義)라는 수식어가 왠지 무색해 보인다. 아마도 처음 충의사에 배향될 의사 선정 때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비록 427년 전의 일이라 해도 향토방위에, 더 나아가 국토방위에 헌신한 스님의 위국충절(爲國忠節)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다.

유교 공간인 충의사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으나, 불교 사찰인 밀양 표충사에 임진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유정)를 모시는 유교 공간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제라도 관계 기관이나 관련 단체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 주길 바란다. 박채은 임란의병연구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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