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내가 사는 집을 기준으로 내가 다니는 학교는 동쪽 편에 있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 할 때나 저녁에 퇴근 할 때는, 늘 태양을 오롯이 마주하며 아침을 달리고, 저녁을 달린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과 맞닥뜨리면서 ‘오늘은 괜찮겠지, 오늘은 어제보단 좋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그러다 해 질 무렵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도로를 달리다 보면 문득 거대한 노을과 맞닥뜨릴 때도 있다. 그 풍경은 뭉클하기도 하고 숙연하기도 했다. 해가 지는 것일 뿐인데 왜 그럴까. 누군가 그립기도 했고, 아무도 그립지 않기도 했다. 그러며 ‘또 하루가 멀어지고 있구나’하며 조금은 텅 빈 가슴 안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목표로 했던 하루의 할당량을 마쳤다는 대견함에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어느덧 한 해의 반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되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라는 시가 자꾸 생각난다.) 아이들은 이제 막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중요했던 학교 시험들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맞닥뜨려야 할, 버티어야 할 힘겨운 나날들을 남겨두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사건들이 있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경계선이 되는 해. 평생 잊지 못하는 해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내가 고1 때였다.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그 때는 요즘처럼 학교에 ‘놀토’ 라는게 없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 안, 나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결국 학교를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곳은 기차역이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또 타고, 내린 역은 바다가 있는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바다가 나왔고, 그 곳엔 큰 다리가 있었고, 다리 밑으로는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한참이나 다리 아래 출렁이는 바다를 보며, 어쩐지 바다가 날 손짓하는 듯한 착각에도 빠져 들었고, 내 주위의 많은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아, 여긴 학교가 아니구나. 번뜩 정신이 들었고, 달리고 달려서 다시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하루 동안의 짧은 외출이 끝나고 있었다. 그 후 어머니는 그날 일에 대해서 묵묵히 견디며, 나에게 말없는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후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필사적인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날이 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와 격려라고 생각한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와 격려의 ‘려’는 ‘애쓴다’는 뜻이다. 넌 잘 할 수 있다며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격려가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파이팅!’이라는 따뜻하면서도 씩씩한 말 한마디는 자신이 위로 받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가장 크나큰 격려가 아닐까.

7월.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 같은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렸으면 좋겠다. 눈부신 해를 품고, 가슴 뭉클한 노을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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