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된 개인의 생활 녹취·저장
언제든 과거 들춰낼 수 있는 세상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 가져야

▲ 민영주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요즘 진료실 풍경은 과거와 다른 점들이 있다.

하나는 드물지 않게 환자, 보호자가 핸드폰으로 상담 내용을 녹음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의사에게 사전 양해를 하고 녹음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양해는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이에 대해 동료 의사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 양해 없는 녹음에 대해 언짢게 느끼고 있었고 몇몇은 녹음 중단을 요구한다고 한다. 의사들이 진료 상담 시 녹음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그 이유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가 아닐 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필자도 초기에는 같은 우려를 했었다. 은밀하게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하는 걸 알게 되면 기분 상했었다. 그러나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지켜보니 녹음의 목적이 그런 부정적 의도가 아니라 상담 내용을 다시 듣기 위해 그리고 가족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사전 양해 여부와 상관없이 녹음이 잘 되도록 도와주고 있다. 왜냐하면, 상담 내용을 녹음해 두면 오히려 환자와 보호자가 진료 과정을 잘 이해하는 긍정적 효과가 더 클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암 환자의 치료에 대한 효과 판정을 할 때 치료 전·후 CT 영상을 진료실 모니터에 띄워놓고 설명하게 되는데 가끔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을 원하는 환자, 보호자들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좀 당황했었지만 이젠 흔쾌히 영상 촬영을 허락한다. 아니, 허락할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건네받아서 직접 찍어 준다. 치료 후 얼마나 좋아졌는지 궁금해 하는 가족들에게 잘 보여줄 수 있도록 편의를 봐드린다.

이러한 녹취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일상화로 이전 진료실에선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사실, 진료와 관계된 모든 자료는 이미 전산화, 디지털화 된 지 오래되어 언제든 과거 내용을 찾아보려면 다 찾아볼 수 있는 의료 환경이 되어있다. 의료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은폐하기 위해 의료진이 의무기록을 변조한다는 건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전산으로 누가, 언제, 어떤 내용을 조회했으며 또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 모두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실내외에 설치된 CCTV에 수없이 노출되며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차량 네비게이션, 사물인터넷(loT), 카드결재, 컴퓨터 검색, SNS 그리고 핸드폰 통화 및 메시지 등 일상생활이 녹취, 저장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살면서 잘 느껴지지 않는 건 다만, 그러한 행적을 확인받아야 할 문제가 다행히 생기지 않아 그냥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행적이 녹취되고 저장되는 환경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세상이다. 이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삶의 자취는 점차 사라지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먼 과거에도 세세히 행적이 녹취되고 기록되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왕이나 고위 관료에게 있었던 특별한 일이었다. 보통사람들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았고 오히려 쉽게 잊어지는 것이 더 문제였다.

잊어짐을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잊어짐은 이로운 점도 있는 게 사실이다. 잘못과 허물이 있는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과거를 켜켜이 머리 위에 쌓고 현재를 살아가는 세상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가 사라지지 않는 세상, 언제든 과거 허물을 들춰낼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더 나아가 시공간을 초월한 누군가가 지켜볼 수 있는 환경에서 지금 우린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까? 조선시대 왕이나 고민해 봤을 법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닥쳐와 있다. 그 동안 배우고 익혔던 지식과 지혜로는 답을 찾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이다. 우리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이에 대한 문제인식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닫고 파악하는 것이 우선 시급한 때이다. 민영주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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