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 16. 반구서원(상)

▲ 반구서원은 원래 ‘반고서원’이라는 이름으로 1712년(숙종38) 건립됐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 이후 언양 지역 유림들이 반구서원을 지금의 장소로 이전해 다시 문을 열게 됐다. 반구서원에서 내려다 보면 옛날 서원의 터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조선시대 불교 퇴락하며
절터에 서원·정자 세워
숙종 38년인 1712년 건립
정몽주의 편지 글귀서
‘반고’ 따와 서원명으로
‘반구’와 한동안은 병용
현재 반구서원 널리 쓰여
울주로 유배왔던 정몽주
‘독락당’의 주인 이언적
‘남명집’ 편찬 참여한 정구
3명의 위패 모셔져있어

현재 반고서원 유허비(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 비각(碑閣)이 있는 장소의 바로 아래 평평한 자리에는 원래 신라시대에 건립된 반고사(磻高寺)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퇴락하면서 이 반고사 절터에 반고서원(槃皐書阮)이 들어섰다. 반고사는 원효대사가 머물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던 절이다. 이 사찰에서 원효는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을 지었다. 지금은 전해오지 않지만 아마도 ‘삼론학(三論學)’과 관련돼 있는 저술로 추정된다.

▲ 반구서원 지의문.

대곡천 굽이굽이의 명승에는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절터가 대부분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폐사지가 되거나 서원, 정자 등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대곡천을 따라 물이 돌아가는 백련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그 전에 백련사가 있었고, 정몽주가 자주 왔던 반구대 물돌이 지점에는 반고사가 있었다. 그 위쪽 천전리 암각화 맞은편 계단식 논에는 오래전 지어졌던 천전리 사지(寺址)가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유교로, 유교에서 기독교로, 다시 유교에서 불교로 끊임없이 변하는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서원은 부흥과 철폐령 사이에서 부침을 거듭해 왔다.
 

▲ <헌산지>에 실린 반구서원 창건록.

◇언양지역 최초의 서원 반구서원

반고사가 있었던 자리에 들어선 반구서원(반고서원)은 조선 숙종 38(1712) 건립된 언양현 최초의 서원이다. 반구서원은 언양 지역 유교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장소였다.

<헌산지(獻山誌)>(1757) 단묘(壇廟)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창건록)이 있다.

“반고서원(槃皐書阮): 고을 북쪽 18리 반구산 남쪽에 있다. 숙종 임진년(1712)에 사림(士林)이 이 곳을, 예전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이 자취를 남긴 곳이고, 문목공(文穆公) 정구가 여기에 살고자 한 뜻이 있었으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도 이 고을에 유배되었을 때 이 곳에 노닐었고 하여, 마침내 서원을 세우고 이름을 붙였다. 반고(槃皐)는 문목공의 편지에 적힌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반구서원은 원래 이름이 반고서원(槃皐書阮)이었는데, 반구서원(盤龜書阮)로도 함께 불려오다가 현재는 반구서원(盤龜書阮)이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혹자들은 ‘반고’와 ‘반구’의 명칭 전이가 발생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한자를 들여다 보면 ‘槃皐(반고)’와 ‘盤龜(반구)’는 완전히 다른 글자다. 반고(槃皐)는 정몽주의 편짓글에서 따온 것이며, 반구(盤龜)는 반구대에서 따온 것이다.

▲ 반구서원 내에 걸린 현판들.

◇정몽주·이언적·정구

이 서원에는 포은 정몽주(1337~1392), 회재 이언적(1491~1553), 한강 정구(1543~1620)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회재는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에게 글을 배웠다. 사헌부 지평·장령·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중종 25)에 사간원 사간에 임명됐는데, 김안로의 재등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귀향한 후 자옥산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오로지 학문에 열중했다. 독락당은 경주 양동마을에서 불과 몇 킬로 안 떨어져 있는 곳으로, 인근 자계천의 물은 독락당을 거쳐 옥산서원에 닿는다. 독락당(獨樂堂)은 이름 그대로 혼자 유유자적하면서 즐기는 정자다. 회재는 독락당의 계정에 서서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생각했으리라.

한강은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했다. 13살 때였던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 한다. 1563년에 이황을, 1566년에는 조식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1603년 <남명집(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했다. 회재가 죽을 때 정구는 10살밖에 안됐지만 학문적으로 회재와 한강은 영남학의 한 계통이었다.

그는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면서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바로 귀향했다.

헌산지 반고서원 창건록을 보면 한강 정구는 ‘이 곳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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