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동(日山洞)은 본래 울산 동면 지역으로 정조 때에 일산진리(日山津里)라 불렸다가 고종(高宗) 31년(1894)에 일산동이라 했다. 1914년 화정동 일부를 병합한 뒤 1931년 방어진면, 1936년에는 방어진읍에 속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돼 동이 됐다. 어풍대에 거동한 임금에게 햇볕을 가려주기 위해 일산을 모래밭에 꽂은 이후로 일산은 일산(日傘)이었다가 뒤에 "산(傘)"이 "산(山)"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어풍대는 댕바위, 울기등대와 함께 방어진 반도의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일산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따라 북으로 가면 일산진(日山津) 마을을 지나 동해로 돌출한 작은 반도에 거센 동해 파도로 수 만년을 시달린 기암들이 있는데 이곳이 어풍대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큰 과업을 이룩하니 나라는 부강하고 오랜 태평성세를 이루어, 임금들이 왕관을 쓰고 줄을 이어 명승지를 찾아 풍류를 즐기는 일이 잦아졌다. 이곳 어풍대는 신라의 수도 경주와는 백리길이 못되며, 시원하고 아름다운 절경지라 임금이 자주 궁을 나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하여 어풍대라 이름하였다. 왕의 행차에는 좌우로 문무백관이 호위하고 수많은 호위병과 궁녀들이 따랐을 것이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바다향기가 물씬 풍기는 일산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어풍대로 건너가기도 하고 뱃놀이를 하기도 하니 녹의홍상(綠衣紅裳) 고운 옷들이 화려한 꽃들처럼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곳 나루터를 고늘이라 했고 한자로 뜻을 새겨 쓴 것이 화진(花津)이다.

 고늘이라 함은 "꽃"의 옛말이 "곶"이요 나루의 고어가 "늘"이므로 이 꽃과 나루를 묶은 것이 꽃나루인데, 이 꽃나루의 옛말이 곧 "곶늘"이다. 이 곶늘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음이 변해 지금의 고늘이 됐다. 그 뿐 아니라 임금이나 왕후, 왕세자가 외출할 경우 자루가 긴 양산으로 해를 가리거나 비를 피하도록 의장(儀仗)을 받치는데 이것을 일산(日傘)이라 했다.

 궁녀들의 꽃다운 옷으로 말미암아 화진이 생겼다면 임금의 일산으로 생긴 이름이 바로 일산진이다. 이 일산진이라는 이름도 변해서 일산이 되어 버렸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일산진의 백사장이 마치 일산(日傘)과도 같이 둥글게 눈에 들어온다. 이와 같이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하던 시절 왕의 외출은 곧 백성들로부터 경외(敬畏)의 시각과 함께 땅이름까지 남게 되는 역사성 있는 범국가적 행차였다.

 전직 대통령의 외출에 따른 편의를 위한 신호변경 등 교통통제가 하루 평균 한차례 이상이나 돼 국민의 불편을 초래한다고 언론에서 전하고 있다. 어느 대통령은 외출이 매우 잦고, 어느 대통령은 한번도 교통통제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덧붙이고 있다. 만인제왕사상(萬人帝王思想)이 지배하는 오늘날 국민은 오히려 대통령이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앞으로는 옛 성인들이 편력노정(遍歷路程)에서 현문현답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던 만큼의 고매한 인품을 지니지 않으면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이 외출 시에 박수를 받고 족적이 기록되는 예우를 바라기가 매우 힘들어 질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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