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충의정신의 표상으로 신라충신 박제상을 첫번째로 꼽는다면 영월에서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嚴興道)를 최우선으로 든다.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戶長)으로, 단종이 영월로 유폐된 이후 왕명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강물에 던져지자,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하겠다’는 왕명에도 불구하고 아들 3형제와 함께 밤중에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이 인물이 영월엄씨 후손들이 삼동면 둔기리 작동마을에 건립한 원강서원에 모셔져 있다.

이번에 발간된 책 <조선충신 엄흥도>는 원강서원에서 제사를 올리는 영월엄씨 울산종중회가 출간한 것이다. 울산은 충의의 고장이라고 자부하는 도시인만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신라 충신 박제상은 말할 것도 없고 울산 출신 임란공신만 해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엄흥도는 울산에서 출생한 인물이 아니면서도 적지 않은 기록물과 여행서 등에 울산과 관련된 인물로 등장한다. 엄흥도는 그만큼 전국적인 인물이면서 울산지역의 충의정신과 직접적으로 결부돼 있다. 삼동면 작동마을의 원강서원에 서 있는 ‘증공조참판엄공원강서원비’(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는 우리나라의 충의정신을 대표적으로 설명해주는 기록이다. 이 비는 1820년(순조 20) 홍문관제학 조진관이 엄흥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호장 엄흥도는 비록 미관말직이었지만 충절은 그 어느 충신보다 강했다. 그는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는 말을 남긴 후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꺼리낌없이 했던 엄흥도는 후대에 충의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았다.

선조는 후손을 찾아 호역(戶役:집집마다 부과했던 부역)을 면제해줬으며, 현종은 송시열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후손들이 벼슬에 오르도록 했다. 영조는 정문(旌門)을 세웠고 그를 공조참판에 추증했으며, 고종은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특히 고종은 원강서원에 ‘불천위’(후손들이 살아 있는 한 제사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명령) 신위를 내리고 제문과 제사 때 사용할 물목, 제물이 든 단자까지 보냈다.

엄흥도의 충절과 신의는 시대를 건너 뛰어 후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정신에 틀림없다. <조선충신 엄흥도>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충의정신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이 원강서원에 특별한 후원을 했고, 그 엄홍도의 정신이 울산 원강서원의 비석에 새겨져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교육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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