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춘봉 사회부 차장

2009년 4월 검찰 관계자의 입을 통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 때 1억원짜리 명품시계 두개를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첫 보도후 한달뒤 노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가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 박연차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했다는 보도가 또 검찰의 입을 빌려 나왔다. 보도후 인터넷에는 ‘명품시계 찾으러 봉하마을로 가자’는 식의 조롱성 글이 잇따랐다. 검찰발 발언과 인터넷상의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 등으로 고통받던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소 전에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흘리는 행위는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 공표죄에 해당하는 명백한 범죄다. 헌법은 확정판결이 있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만큼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 재판이나 피의자 압박용으로 악용되는 폐단을 근절해야 한다는 게 입법 취지다. 하지만 보도자료나 브리핑을 통해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공표하는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피의사실 공표를 통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피의자 중에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이도 있고, 공표당시 혐의보다 줄어든 일부 범죄사실만 인정받는 사람도 있지만 대중은 대부분 공표당시의 혐의만을 기억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한다.

울산지검이 최근 ‘피의사실공표 연구’라는 연구서를 발간하고 엄격한 적용을 촉구하면서 사실상 사문화된 피의사실공표죄 처벌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피의사실 공표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기관이 바로 검찰 조직이라는 점에서 내부의 우려섞인 시선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피의사실공표죄를 들고 나온 울산지검의 속내가 순수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울산지검은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울산지방경찰청 소속 경찰관 2명을 입건하고 출석을 요구한 상황인데, 기소 사례가 전무한 이 법을 적용하려는 것은 고래고기 환부사건에 대한 보복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피의사실 공표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울산지검 만의 주장은 아니다.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지난 5월 피의사실 공표 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어 이를 통제할 법률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피의사실 공표가 현행법상 위법이지만 모호한 예외조항 때문에 구체적인 혐의내용이나 피의자의 진술 태도 등이 여과없이 보도됐다’며 허용되는 공보 행위와 처벌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고, 공보 대상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게 검찰 과거사위의 입장이다.

울산에서 촉발된 논란은 이제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울산지검이 진행 중인 피의사실 공표죄 수사의 계속 여부를 대검 산하기관인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판단하게 됐기 때문이다. 울산지검은 피의사실 공표죄 연구 및 책자 발간의 목적이 사회적인 논의 확산이라고 밝힌 만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현행법상 피의사실 공표는 명백한 범죄행위지만 보이스 피싱이나 유사 수신 등 추가 피해예방을 위한 공익 차원의 예외적인 허용 또한 불가피한 점도 현실이다. ‘훈령 수준의 공보준칙을 없애고 수사공보법을 만들어 허용되는 수사공보와 처벌대상인 피의사실 공표를 명확히 구분하라’는 검찰 과거사위의 조언을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다.이춘봉 사회부 차장 bong@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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