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비가 오면 서출지로 향한다. 연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내 여름은 비로소 시작된다. 사실 연꽃보다 마음을 빼앗기는 곳은 따로 있다. 서출지 가까이에 있는 남산동 쌍탑이다. 비를 머금은 두 기의 탑은 맑은 날에는 잘 보이지 않던 세세한 부분까지 도드라져 보인다.

경주에는 수많은 탑이 있다. 그 중 내가 정한 탑 순례의 출발점은 보물 제124호인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모전석탑 양식이고 서탑은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삼층석탑이다. 두 양식을 두루 살펴볼 수 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남산을 배경으로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동·서로 마주보는 탑의 중앙, 석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감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비 맞은 잎사귀는 초록이 짙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리는 가을이면 불을 밝힌 듯이 주변이 환하다. 그 감나무 곁에 서서 동탑의 지붕돌을 한참 바라보다 서탑의 이층기단에 돋을새김한 팔부중들과 천천히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탑을 마주한 텃밭에서 스님 두 분이 일을 하고 계신다. 도라지꽃이 무더기로 피었고 호박꽃도 아침 기운을 받아 샛노랗다. 비를 맞아 호기로운 팔부중상이 스님들을 수호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9세기에 건립된 두 기의 탑은 동남산 자락의 주인이며 마을의 수문장 역할도 하고 있다. 칠불암을 오르거나 호젓한 남산 길을 걷는다면 이 탑을 지나야 한다. 천년을 넘어 사람들과 어울려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얼룩덜룩 마음에 상처 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치유의 공간이기도하다.

탑 마을을 천천히 둘러본다. 고즈넉한 동네 골목에는 능소화가 환하다. 기와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길을 따라 10분만 걸어가면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덤으로 볼 수 있다. 마을 안쪽으로 살짝 들어서면 예쁜 한옥 민박집이 보인다. 마당에 온갖 꽃을 가꾸고 있는 주인장은 기타 실력도 수준급이다. 그 집에서 하룻밤 묵으며 달빛에 함빡 물든 탑을 보고 싶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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