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동에서 태화강을 따라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신삼호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다운(茶雲)동에 들어서게 되고 이곳이 바로 달성서씨 감찰공파(監察公派)의 집성촌이다.

 울산사람들은 흔히 달성서씨를 다전서씨라 부른다. 400여년 전부터 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다운동은 원래 울주군 범서면 지역으로 정조 때에는 다전이라 했다. 고종 31년(1894년)에 다전과 운곡 두 마을로 나뉘어 졌다가 1914년 다전과 운곡, 인근 서사리에 속했던 신안동 일부를 합해 다운리가 됐다. 다운(茶雲)은 다전(茶田)의 "다(茶)"와 운곡(雲谷)의 "운(雲)"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운동의 옛 이름이 다전인 까닭은 옛부터 이곳에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운동은 태화강 중류 굴화천과 국수봉에서 흘러내리는 척과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토질이 두텁고 사시사철 양지 발라 삼동 추위에도 땅이 얼지 않는다. 또한 기후가 고온다습해 차나무가 식생하기 좋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의 차를 왕에게 토공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다운동에서 다전서씨 집성촌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1991년 도시계획이 실시되면서 급속도로 도시화됐기 때문이다. 집성촌을 이루면서 한 때 40~50가구를 헤아렸던 것이 지금은 15가구 정도 남아 현대화된 주택과 아파트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을 모시던 사당 "다산사(茶山祠)" 터가 명맥을 유지했지만 그나마 이것도 도시계획 와중에 사라졌다. 다만 망조당의 네 아들 관(寬), 용(容), 정(定), 안(安)이 말에서 내릴 때 디뎠다는 하마석(下馬石)만이 외롭게 옛 추억을 곱씹고 있을 뿐이다.

 현재 다전서씨 집성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은 울주군 범서면 사연리 뿐이다. 이곳도 한 때는 다전서씨 50여가구가 모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지만 젊은이들이 객지로 나가면서 지금은 25가구 정도만이 남아있다. 그래도 서씨고가를 비롯해 전형적인 집성촌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달성서씨 감찰공파 후손들은 약 1508년(중종 1년) 감찰공 서근중(徐近中)의 아들 건손(乾孫)이 울산 남목에 종7품 주부(主簿)로 벼슬살러 왔을 때부터 울산에 터를 잡았다. 건손은 달성서씨 시조 서진(徐晋)의 7대손으로 울산 다전서씨의 입향조가 된다.

 다전서씨의 가세는 건손의 증손 인충이 임진왜란 때 활약하면서 일어선다. 인충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방보(邦輔)이며 호는 망조당이다. 1591년(선조 24년) 무과에 급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종(再從) 몽호(夢虎)와 함께 가군수(假郡守) 김태허(金太虛)를 도와 왜적을 토벌해 불과 1개월이 못돼 적병 3천명을 사살했다.

 그 뒤 대구 팔공산 전투와 창녕 화왕산성 전투 등에서 참전, 뛰어난 공을 세워 선조는 남옥(현재 울산의 남목)을 식읍채지로 하사한다는 교지를 망조당에게 내렸다. 다대포첨사를 거쳐 부산첨사을 지낸 망조당은 사후 정조로부터 병조참판(兵曹參判)의 관직을 받고 다산사에 모셔졌다.

 그 뒤 대원군이 사원 철폐(撤廢)를 명하기 전까지 매년 다산사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만조당을 기리는 제사가 올려졌다. 국가가 지내는 제사는 울산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로 다산사는 다전서씨 일가에게는 큰 자랑거리다.

 망조당의 사망 연대는 확실치 않다. 자손들에게 재산을 나눠준다는 기록을 담은 망조당의 분재기(分財記)를 통해 추측해 볼 때 약 1610년(광해군 2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관, 용, 안, 정 등 인충의 아들 4형제는 3년상을 지낸 뒤 약 1612년(광해군 4년) 남목에서 다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관의 후손들은 다운동 남쪽(운곡으로 추정), 정의 후손들은 명정과 사일(사연), 안의 후손들은 다전 북쪽(다전으로 추정)에서 가세를 확장했다. 불행히도 용은 후사가 없었다.

 진욱(鎭昱)(65·울산대 사회교육원 주임교수)씨는 "망조당의 후손들은 태화강을 따라 각 마을에 400여년 동안 뿌리내리면서 10년 전 통계치로 모두 1천470가구가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고 서상연 경상일보 논설실장이 장손인 사일마을 큰집은 특이한 전통이 있는데 절손으로 인한 양자계승 없이 결혼하면 첫아들을 낳아 10대째 자계승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라며 "이는 조상의 산소와 거주하고 있는 집터(서씨고가)와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전서씨는 각 마을별로 학자와 효자를 많이 배출했다. 다전에서는 학자들이 많다. 진욱 할아버지는 다전서당과 다산사의 영향이 크다고 말했다. 다전 출신 인물로는 고 서대규(大圭) 전 대구사범대 교수, 서진환(鎭煥) 전 교통부기감, 서진길(鎭吉) 전 울산문화원장이 있다.

 운곡마을 출신으로는 서진관(鎭寬) 전 경남재향군인회장과 서진상(鎭尙) 전 양산군수가 있다. 서석수(碩洙) 부산대 약학대학 교수, 서천수(千洙) 부산대 영문학과 교수도 각각 운곡과 난곡마을 출신이다. 부산대에서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서근태(根泰) 울산발전원 초대 원장도 난곡 마을에서 자랐다.

 명정마을은 효자로 유명하다. 망조당의 증손 필형(必逈)의 효행은 〈울산읍지〉에도 전한다. 〈울산읍지〉에 따르면 필형은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묘를 섰다가 9살 때 철이 들어 다시 장사를 지내고 3년동안 상복을 입었다. 이후 30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필형은 명정마을에서 10리나 떨어진 어머니 산소를 매일 곡을 하며 찾았다. 이에 발이 불어터졌다. 필형이 세상을 뜬 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울산부사 유담후는 그를 기려 매년 제사를 지냈다.

 사일마을은 서석인(碩寅) 전 해운대 구청장과 해운대구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아들 서병수(柄洙)씨의 고향이다. 이밖에 고 서상연(相演) 경상일보 논설실장과 서상용(相瑢) 울산MBC 보도부국장 등이 사일마을 출신이다. 서대현기자 sdh@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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