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원에 스토리 입히는 건 시민몫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유구한 역사성
울산만의 이야기로 차별성을 갖추자

▲ 이재명 논설위원

임금이 태화루를 직접 찾아와 신하들과 연회를 즐겼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한양도 아닌 개경에서 우리나라 동남쪽 끝 태화강까지 행차했다는 것 아닌가. 당시 성종은 모르긴 몰라도 태화루에 올라서서 신하들과 함께 태화강을 바라보면서 남산의 은월봉과 장춘오, 벽파정 등을 감상했으리라. 그리고 그 아래에 출렁거리는 태화강물과 뛰어오르는 물고기, 그리고 굽이쳐 돌아가는 지금의 국가정원을 바라 보았으리라.

태화강 국가정원은 순천만 국가정원과는 차원이 다른 정원이다. 순천만의 국가정원은 허허벌판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이지만 태화강 국가정원은 고려 성종 때 이미 국가정원의 역할을 했던 역사가 깊은 정원이다. 우리나라 누각 가운데 임금이 직접 행차해 신하들과 함께 술상을 차려놓고 풍광을 노래했던 지방 누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만큼 태화강 국가정원은 태생부터 국가정원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태화강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대곡천에 천전리 각석이 있다. 이 각석 인근에는 신라시대 때부터 왕족들이 자주 놀러왔다. 그 중에는 진흥왕도 있었다. 천전리 각석 인근은 그만큼 풍광이 뛰어났다. 화랑은 물론이고 승려, 관리, 왕족까지 대거 이 곳에 와 흔적을 남겼다. 이른바 그 시대의 유원지였던 셈이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525년(법흥왕 12) 6월18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누이 어사추여랑과 함께 천전리 각석에 와서 아름다운 풍광과 바위그림을 보고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지은 뒤 바위면에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후 14년 뒤인 539년(법흥왕 26년) 7월3일 법흥왕비(부걸지비), 사부지갈문왕비(지몰시혜비), 심맥부지(진흥왕) 등이 방문해 14년 전에 새긴 바위면에 자신들의 행사 사실을 새겼다. 두 번의 행차 기록은 마치 책을 펼쳐 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태화강 강가에 두 임금이 차례로 방문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채롭다.

이 뿐만 아니다. 태화강 국가정원은 고래가 놀던 바다정원이었다. 동해에서 놀던 귀신고래가 돗질산과 염포산 사이로 들어서면 지금의 국가정원 일대는 말 그대로 고래의 풀장이었다. 고래들은 태화루를 거쳐 남산과 명정천을 지나 다운동 일대까지 회유했다. 경북대학교 황상일 교수에 의하면 태화강 국가정원 일대는 수심이 15~30m의 큰 바다였다. 지금으로 치면 현대자동차 앞바다가 울산만이지만 7000년전에는 태화루와 그 일대의 용금소, 국가정원 일대가 다 울산만(古蔚山灣)이었다.

내륙 깊숙히 들어온 이 고울산만(古蔚山灣)은 바다 생물의 천국이었다. 울산의 선사인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최상류인 다운동 일대까지 고래가 올라오자 배와 작살로 사냥을 했다.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은 바로 국가정원에서 뛰어놀던 귀신고래였을 지도 모른다.

태화강 국가정원 인근에서는 우리나라 외교사를 빛낸 이예도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고의 외교관인 이예 선생은 바로 이 태화강 국가정원을 거쳐 부산으로, 대마도로, 오키나와로 나아갔다. 이예는 울산의 한낱 이족이였지만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에 저항해 군수를 구출해오고 일본에서 수백명을 귀환시켰다. 저 태화강 강가에서 멱감던 어린이 이예가 서희에 버금가는 외교부 인물이 될지는 누구도 몰랐다.

국가정원은 산림청이 지정한다. 그러나 지정된 국가정원에 스토리를 입히는 일은 울산시민들의 몫이다. 국가정원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이쁜 꽃과 나무와 정원만 있다면 다른 국가정원과 별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순천만 국가정원에도 기화요초는 수없이 많고 세계적인 정원과 환상적인 인공시설물들이 끝없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울산만의 세계적인 역사성과 스토리다. 결코 순천만 국가정원을 낮춰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태화강 국가정원은 자연 그대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차별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정원에 인문(人文)의 옷을 입히는 것, 그 것이 태화강 국가정원을 세계적으로 차별화하는 길이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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