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RUPI사업단장

20여년 전 일이다. 한국화학연구원 대전본원에 있을 때 우리 연구팀은 신(新)촉매·공정 개발에 푹 빠져 불철주야로 정신이 없었다. 근자에는 신촉매 개발에 그래도 적잖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사정이 매우 열악했다. 우리 팀은 값싸고 성능이 더 좋은 암옥시화 촉매를 개발하고자 무모할 정도로 덤벼들었다. 악조건 하에서도 적은 연구인력으로 1000시간의 롱런(long-run) 테스트까지 성공리에 마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촉매는 대부분 외국제품이다. 당연히 공정도 외국기술이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왔다. 국제 특허도 여러 개 받았고 세계적인 논문도 실었다. 그러나 곧 “신촉매를 산업현장에 어떻게 적용하느냐?”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지금까지도 일본 등 외국 촉매로 가동하고 있는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그쪽 연구원들이 직접 우리가 개발한 신촉매로 실험해 그 성능을 인정받았다. 운전조건은 훨씬 마일드하고 2배 이상 뛰어난 생산성을 보인다는 획기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도 산업현장에서 이를 외면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경제보복을 해 오는 것도 실상 우리 내부에서 빌미를 제공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성찰해야 한다.

지금 반도체 소재 국산화를 둘러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동안 잠수해 있던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국내 반도체 대기업이 국내 중소업체와 협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 수출규제 이전에는 품질 관리를 이유로 국산 소재 도입을 꺼려온 게 사실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소재의 국산화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지만, 국산 소재·부품을 대하는 대기업의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이유다. 품질 이슈 때문에 국내산 제품을 쓰지 못한다면 영원히 일본 기업을 키워주며 종속관계에 있겠다는 말인가. 물론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산업은 글로벌 분업화 체계인 것은 틀림없다. 각 업체마다 가장 잘 만든 소재를 구해 세계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을 말한다.

현재 국내 대기업들은 고순도 불화수소를 비롯해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일본의 3대 수출규제 품목 대체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드러난 3개 품목은 대기업 총수들이 직접 나서는 등 백방의 노력으로 해결하겠지만, 한국이 화이트 리스트 국가에서 배제되면 추가 규제될 가능성이 있는 1100여개의 품목들은 또 어쩔 것인가. 핵심소재들이 규제 품목으로 확정될 때마다 모두 국산화하거나 대체 수입국을 일일이 구하기란 현재 글로벌 분업체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신뢰에 대한 간극이 크다. 하지만 그것을 메우고 접점을 만들어주는 건 오롯이 정부의 몫이다. 중소기업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술개발과 상용화에 뛰어들도록 안전장치를 갖춰주는 일. 대기업이 안정적인 일본산 대신 실험적인 국산에 손을 내밀도록 유인책을 제공하는 일. 역대 정부마다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힘줘 말하지만 어느 정부도 산업생태계를 만드는 실질적인 산업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국산 기술을 갖고도 일본에 의존하는 상황이 지속돼 왔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도 제대로 설정되지 못한 것이다.

‘기업 경쟁력이 국력’인 세상이다. 재벌과 대기업을 혼동해선 안 된다. 대기업 때리기에만 올인해선 더욱 안 된다. 정부가 진정으로 극일(克日) 의지가 있다면 중소기업의 기술력 향상 지원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국가 간의 기술격차를 극복하고 기업 간의 신뢰를 만들어주는 건 정부의 역할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상하 관계가 아닌 동반자적 관계로 가야 한다. 일본의 수출규제 사태가 어떻게 끝나든, 이번 기회에 정부는 소재산업 육성의 확실한 시스템으로 산업생태계를 세밀하게 구축하길 부탁한다. 곰곰이 살펴보면 산업혁명은 곧 소재혁명이기 때문이다. 서로 ‘네 탓이오’를 외칠 것이 아니라 먼저 ‘내 탓이오’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RUPI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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