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호 울산과학관 파견교사

더운 여름이다. 휴대전화 메신저로 전해오는 어딘가로 휴가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로 계곡으로 여행 간다는 자랑이 밉지 만은 않은 8월의 문턱이다. 휴가 기간 동안 운영하지 않는다는 헬스장의 문구가, 휴가가 시작되기 전 맡긴 옷을 찾아가란 세탁소의 문자가 싫지만은 않다. 자신만의 익숙한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땀 흘렸던 사람들이 설레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고 다시 익숙했던 공간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교직생활 동안 처음으로 맞이하는 학교가 아닌 공간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아이들과 시민들을 맞이한다는 것은 신선한 삶의 전환이다. 과학관에 근무하면서 좋은 점은 주말에 근무하지만 월요일이 휴무라는 점이다. 늘 익숙했던 월요일 아침 풍경이 달라졌다. 내가 있는 월요일 공간이 달라졌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바쁘게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 직장인들을 구경하다 서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많은 도서를 쭉 보다 한 권의 책에 시선이 머물렀다. 바로 김정운 교수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책이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 공간이 문화이고, 공간이 기억이며, 공간이야말로 내 아이덴티티다.”라는 카피가 눈길이 끈다.

이 책에는 슈필라움(Spielraum)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놀이(Spiel)’와 ‘공간(Raum)’의 합성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주체적 공간’을 뜻한다. 즉, 슈필라움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인간으로서의 창조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교수라는 지위를 박차고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김정운 교수에게 슈필라움은 자신이 꿈꾸던 바닷가 작업실이겠지만 교육자로서의 나는 슈필라움을 통해 학교와 교육공간을 상상해 본다. 나아가 ‘아카데미’의 의미를 그려 보았다.

16~17세기 대학(university)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될 때까지 고등교육기관이던 아카데미는 ‘아카데미아’라는 아테네의 한 올리브 나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올리브 나무 아래의 공간은 플라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에게는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영위하는 교육의 공간이자 놀이였으며, 문화이고 삶이자 현대적 의미의 슈필라움이었을 것이다.

요즘 사회문화뿐만 아니라 교육에까지 ‘공간’ ‘공간혁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얼마 전 모 강연 프로그램에서 건축학자 유현준 교수는 ‘감옥 같은 학교 건물을 당장 바꿔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꽤나 강연 제목이 자극적이었지만 동감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왜 우리는 교도소 같은 학교 담장과 똑같은 건물, 똑같은 교실의 학교 공간 속에서 교육하는가?” “왜 학생들을 위한 놀이 중심의 학생 자율의 주체적 공간으로 될 순 없는가?”라는 물음은 그동안 교육주체로서 우리가 한 번쯤 물어보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부에서 교육청, 민간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교육공간 혁신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 관심이 진정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어른의 눈에서 본 성과중심, 결과중심 공간이 아닌, 아이들 눈높이에서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 슈필라움의 공간이었으면 한다. 학교는 아이의 일생에서 꿈을 키워나가는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윤호 울산과학관 파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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