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입추’ 전문(청마 유치환)

일요일이었던 지난 11일 울산 작천정 계곡에는 마지막 피서를 즐기려는 인파가 송곳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다. 영남알프스 웰컴센터 인근 간월산, 신불산 계곡도 인산인해였다. 지난 8일은 입추(立秋)였고, 11일은 말복(末伏)이었으며, 오는 15일은 광복절(光復節)이다. 이 세 날을 거치면 계절은 속도를 내 가을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추(秋)는 원래 벼가 익었다는 뜻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禾(화)는 의미 부분이고, 火(화)는 발음 부분이다. 벼가 여물어 고개를 숙인 모습을 그린 것이 바로 禾자다. 禾자는 갑골문에도 나온다. 고개 숙인 이삭과 뿌리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 ‘가을’의 어원은 ‘가슬’이다. ‘(이삭을)가르어 스러(쓸어)들이다’의 줄임말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 마을 노인네들은 ‘가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벼 가을은 다했나? 올해 보리가을은 어찌 됐나?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입추는 7월의 절기이다…초후(初候·첫 5일)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후(次候·두번째 5일)에 흰 이슬이 내린다. 말후(末候·세번째 5일)에 쓰르라미가 운다”는 표현이 나온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다. 따라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야 추수를 기약할 수 있다. 입추가 지나서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조정이나 고을에서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이 무렵에는 김매기도 끝나가고 시골마을도 한가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라는 말도 생겼다. 어정거리면서 칠월을 보내고 건들거리면서 팔월을 보낸다는 말이다.

▲ 이재명 논설위원

개가 긴 혀를 내 밀고 헉헉거렸던 삼복더위도 어느덧 말복 고개를 넘으면서 한풀 꺾였다. 해거름녘 마당에 빨간 고추잠자리가 나타났다. 고추밭 고추는 빨간빛을 더하고 하늘에는 언제 왔는지 두둥실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있다. 입추가 지난 뒤의 잔서(殘暑·남은 더위)가 콩밭 위로 어른거리고 있지만 콩고랑 사이에는 어느 사이인가 가을이 오고 있다.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인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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