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역사의 치부인 흑인역사 드러내
여전히 미해결 과제인 인종갈등에도
국민통합 위한 국가역할 보여주는듯

▲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행정학

요즘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중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흑인 박물관이다. 예약 없이는 입장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정식 명칭은 국립 흑인 역사문화 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왕관을 연상시키는 3단 메탈 코로나의 산뜻한 외관부터 다른 박물관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최근 이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관람은 지하 3층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면 1400년대부터 시작된 흑인노예의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다. 노예선에 실린 채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의 짐승 같은 삶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남북 전쟁 후 노예 해방, 그러나 여전한 인종차별과 억압, 이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 마침내 법적·제도적으로 동등한 국민의 자격을 획득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시를 따라 가다 보면 어두운 지하에서 밝은 지상으로 올라온다. 여기부터는 과거를 딛고 미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동하는 흑인들의 현재와 미래 모습이 등장한다. 스포츠, 음악, 국방,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흑인들이 미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다.

‘흑인들이 과거에 엄청난 착취와 억압 속에서 고생했지만, 미국이라는 국가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두 자부심을 갖자’ 이것이 박물관이 던지는 메시지일 것이다. 미국 역사의 큰 치부의 하나인 흑인 역사를 이렇게 멋있고 담담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인종 갈등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미해결 과제이지만, 이 박물관은 국민의 통합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떤 나라든 역사에는 자랑할 만한 것이 있고 또 덮어두고 싶은 것도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6·25를 거치면서 여러 아픔과 갈등, 반목이 있었고, 암울한 독재시기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이뤄 냈고, 경제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흑인박물관처럼 과거는 지하에 묻어 두고 역사적 사실로 담담하게 기억할 수는 없는가. 민주화 세력도, 산업화 세력도 각자 위치에서 나름대로 대한민국의 변화와 발전에 기여했음을 서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새로 쓰려고 한다. 과거 역사를 정파적 시각으로 파헤쳐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정권의 입맛대로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고 박물관의 테마를 변경한다. 이로 인해 국민 통합의 모티브가 되어야 할 역사가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상황을 국민통합의 책임을 진 이른바 국가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선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과의 무역 갈등을 계기로 역사를 매개로 한 분열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다. 외부의 적을 앞에 두고 단합해야 할 시기에 내부에서 역사를 들먹이며 서로 총질을 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역사에는 온갖 상황이 다 포함되어 있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집어내어 상대를 공격하면, 이에 역공할 수 있는 소재가 또 있게 마련이다. 이순신을 내세우면 선조를 들먹이는 식이다. 이래서 역사를 매개로 한 논쟁은 끝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들먹이며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언행은 중단되어야 한다. 오히려 역사를 통해 국민들을 단단히 통합시키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흑인박물관 개관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가 할 일은 역사를 활용해 미래에 훨씬 더 많은 진보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부인 미셸 여사는 부시 전 대통령과 포옹하며 인종 간 화해의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하였다. 비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미래지향적인 국민통합의 계기로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국가 지도자의 모습일 것이다.

정준금 울산대 사회과학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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