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자기애도 잊은 유럽 베끼기
세계적 디자인은커녕 모조품에 그쳐
현대에 맞는 한국적 이야기 디자인에

▲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한달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내일은 광복절. 일본, 정확히는 일본 아베정권의 수출 제한 조치로 시작된 한일 양국간 불편한 관계온도의 급상승은 식을 줄 모르는 무더위 같다. 이 사태를 계기로 일본 및 기타 선진국에 종속된 기술, 소재, 부품분야와 산업 규모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전국민이 알게 되었다. 적잖이 놀라는 분위기다. 앞으로는 완성만 놓고 국산이냐 외산이냐를 다투는 ‘원초’적 평가는 줄어들테니 이는 업그레이드급 수확 아닌가도 싶다. 어쨌건 글로벌 21세기 한가운데에 민족주의라니, 참 아이러니다. 끝없는 일본발 이슈는 매번 억울하고 분하다. 생각이 달라 사과를 모르고, 우리를 만만히 보는 이 상대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극일’ 뿐이다.

찬성 않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은 디자인사에서 ‘종주국’ 혹은 ‘원조국’ 레벨이다. 19세기 산업디자인의 탄생에 역할한 공로는 단순화, 기호화의 탁월함으로 유럽을 감동시켰던 일본의 판화와 미술, 공예품이었다. 고집 센 장인적 역량은 제조업 베이스 산업디자인 분야에서도 일본을 절대강자로 만들었고, 개도국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까지 대부분 일본 것을 베끼거나 참고하는 일본 디자인의 아류에 속했다. 그러나 꾸준한 일본, 미국, 유럽의 디자인 인재와 시스템 도입, 기업들의 대폭적 디자인 역량강화로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 2010년대를 넘으며 외형적으로는 확실히 일본을 앞서는 수준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필자가 2010년경 한국 완성차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신차 디자인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이미 일본자동차는 벤치마킹의 대상이 아니었고, 너무 못생겨서 거꾸로 우리 디자인을 도와준다는 조롱거리였으니 말이다. 디자인의 극일은 진작 이루어진 것일까?

안타깝지만,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이미 추월했다고 여겼던 제품 디자인도 생활가전도 하나같이 일본디자인 판이다. 정교한 디테일과 재료 분리라인, 수퍼모던급의 면처리와 형태, 색상은 발뮤다와 무인양품으로 대표되는 오늘 일본디자인의 정수다. 그토록 못생겼다 비웃었던 일본브랜드 자동차들은 이제 세련되게 다듬어진, 누가 봐도 일본적인 고유스타일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아니 여전히 한국차에 앞선 상대다. 산업디자인에서 극일은 아직 희망사항이다.

극일, 나아가 세계를 리드하는 디자인되기에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가? 세계적 인재와 시스템은 이미 도입 되었고, 잘나가는 기업들마다 디자인부서를 최고 대우 중이다. 제조업, 서비스업이나 인프라도 세계 수위권이니 체력은 오케이.

문제는 자기애가 부족한 데 있다. 우리는 일본디자인을 베끼지 않는 대신 유럽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철학이건 스타일링이건 유럽 것이라면 맹목적 사랑, 소위 최고 존엄을 표했다. 점점 못생겨진다고, 일본 디자인이 퇴보한다고 비웃던 그때, 사실 그들은 가장 일본적인 아이덴티티를 자동차 스타일링에 구현하고 매력으로 어필하는 방법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었다. 몇 세대를 거치며 이제는 완전히 성공했다. 오늘의 일본 브랜드들은 누가 보아도 유럽과 구분되는 디자인이지만 매력적이고, 일본 고급브랜드의 모델들은 일본풍 고유의 고급감이 묻어난다. 독일차 닮았다고, 멋있으면 그만이라고, 디자인 멋지다고 박수치던 우리 모델들은 몇 세대를 거치며 이제 유럽차인지 한국차인지 아예 모르는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가성비 좋은 유럽스타일 비유럽차가 한국차란다. 무인양품스타일, 발뮤다스타일, 다이슨스타일, 애플스타일, 디터람즈스타일이 난무하는 딱 그 수준. 짝퉁, 모조품을 무슨 무슨 스타일이라 포장하고 레플리카라 미화해서 팔아먹는 딱 그 수준. 필자는 그 점이 우리 디자인이 극일도 못하고 세계디자인도 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영국 벤틀리 디자이너로 재직시절 정말 귀따갑게 들었던 것은, 가장 영국적인 것이 가장 벤틀리적인 것이고 그것이 곧 최고 명품의 자격이라는 말이었다. 한국에 와서 한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직접 그런 말을 해보면, 대뜸 “차지붕에 기왓장 얹으라는 말이냐?” “한복이나 처마라인을 딸까요?” 하는 일차원 반응부터 튀어나온다. 사려가 아쉽다.

고유의 스토리는 신화가 된다. 비슷한 이야기는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에 묻혀 사라진다. 대한민국! 스스로 누구인지 골몰하고 나의 정체성, 우리만의 아름다움을 쌓으면 극일 넘어 광복할 수 있다. 디자인만 아니다. 대한독립만세! 단 착각은 금물, Back to 조선이 아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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