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의 이웃 일본
일본의 경제보복, 현명한 대응으로
서로 자해하는 싸움은 되지 말아야

▲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중년 부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평소 남편이 시댁만 챙겨서 다툼이 잦았는데, 갈수록 마음이 멀어지더니 이젠 부인이 병원에서 어떤 진료를 받는지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결혼 초 남편의 외도 사건도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당시 남편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몇 달간 자신의 화를 받아주어서 용서했지만, 이후 남편과 다툴 때마다 옛 상처가 떠오른다. 살면서 미운 정도 들고, 독립하지 못한 자녀를 생각하면 남편과 갈라설 엄두는 안 나지만 배신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부부간 문제는 언제나 복잡하고 조심스럽다. 물론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는 이혼도 선택지 중 하나다. 하지만 부부 중 누구도 가정을 깨뜨릴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한 쪽만 편들어 배우자를 심하게 나무라면 어떻게 될까. 이는 치료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다. 의사는 판사가 아니다. 시비를 가려서 한 쪽의 확실한 굴복을 받아내는 것은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킨다. 부부 갈등을 일방의 잘못으로 단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무리 한 쪽의 잘못이 크더라도 평생 죄인임을 자각하고 살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어차피 함께 살아갈 작정이라면 상대의 입장을 조금씩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간혹 다투다가 감정이 격해지더라도 상식선을 넘어서는 과격한 언행은 삼가야 한다. 그런 행동은 화해를 어렵게 만들고, 설사 화해하더라도 훗날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가 부부 갈등으로 겪은 고통에 공감하더라도 이혼 결정을 대신 해주진 않는다. 아무리 배우자가 밉고 원망스럽더라도, 감정을 추슬러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설득하고 화해할 방법을 찾도록 돕는다. 때로는 오해가 커진 양가 부모나 무책임하고 감정적인 주변 사람들이 사소한 부부 다툼을 큰 싸움으로 부추겨서 파국을 맞기도 한다.

요즘 한일 갈등을 보면서 부부 갈등을 떠올려 본다. 당장 반박의 호통이 들리는 듯하다. 지금 일본과 심각한 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칼로 물 베기’라는 부부 사이와 비교하다니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물론 큰 차이가 있다. 부부는 화해할 수 없으면 이혼하면 되고, 이웃과의 불화는 이사 가면 끝나지만, 일본과는 결별할 수도 땅을 떼어서 멀어질 수도 없다. 숙명적인 이웃이다. 식민 지배 이후 갈등을 겪으면서도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키워온 역사를 생각하면 한일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문제다. 나는 과거의 아픈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과 일본 국민들이 사이좋게 함께 번영하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가장 염려스러운 건 정치인들의 대응이다. 한일 갈등이 시작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현 사태를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로 나누어서 대결을 부추긴다. 대통령은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말하고, 여당의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경제침략이 이미 발생한 상황이라 맞대응해서 싸우거나 항복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고 소리를 높인다. 서울 중구청은 ‘No 저팬’ 현수막을 명동에 걸고, 공영 방송의 앵커는 뉴스 말미에 “이 볼펜은 국산입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불만을 수출 규제로 대응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당연하지만 정권과 기관이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확전을 조장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정치인이 나서서 ‘이제 경제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무조건 정부 편을 들어야 하고, 그간 정부의 대응 과정을 따지는 것은 매국이다’라는 식은 곤란하다. 전쟁 프레임과 애국 매국의 이분법은 현 상황에 대한 의견 개진을 아예 봉쇄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국민들의 지적으로 명동의 현수막은 곧 내려졌다. 문대통령도 12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감정적이어선 안 된다”며 냉정한 대응을 강조했다. 이 말이 진심이길, 그래서 차분하고 현명한 대응으로 ‘서로 자해하는 싸움’에서 벗어나길 기대해본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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