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여름 오후, 홍화문을 지나 창경궁에 들어선다. 담을 사이에 둔 창덕궁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지만 창경궁은 고적하다. 시공간을 넘어 훌쩍 다른 세상으로 향한다. 아직 복원이 되지 못한 전각 터는 휑하니 넓어 햇빛마저 고요하다. 오래된 나무들이 두터운 그늘을 만드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숲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창경궁의 연못 춘당지에 이른다. 춘당지 옆, 언덕에는 제 이름도 하나 갖지 못한 탑이 있다. 삐죽하게 큰 키로 서 있는 팔각칠층석탑이다. 신라탑이나 고려탑과는 달리 균형미나 안정감도 없다.

창경궁 팔각칠층석탑은 높이 6.5m의 라마 양식이다. 불룩한 항아리에 뚜껑을 얹어 놓은 듯한 일층 몸돌에는 1470년에 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은 없지만 엄연한 존재 증명이다.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이 탑은 왕실의 박물관 건립을 위해 1911년 만주 상인으로부터 구입했다는 유래가 안내판에 적혀있다. 보물 제1119호로 한국에 있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다.

얼마 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따라가는 기행을 했다. 중국의 청더, 피서산장을 돌아보고 건륭제의 칠순에 세운 티베트 사원인 ‘수미복수지묘’에 갔다. 조선 사신들과 박지원이 판첸라마를 만나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곳이다. 그 라마불교 사원의 뒤편, 높은 언덕에 초록의 유리기와로 장식을 한 팔각칠층탑이 우뚝 서 있었다. 구조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탑이었다.

▲ 창경궁 연못 춘당지 옆에 위치한 팔각칠층석탑.

창경궁의 팔각칠층석탑도 라마사원에 있어야 할 탑이다. 고향을 떠나 수목이 우거져 촘촘하게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높직한 고임돌에는 연꽃 장식이 많다. 특히 기단의 윗돌과 아랫돌을 앙련과 복련으로 양감있게 조각하여 화려하다. 목조 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도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열하의 유리만수탑을 볼 때와는 달리 쓸쓸함으로 다가온다.

해가 설핏 기울자 청사초롱을 든 남녀가 옥천교를 건너온다. 아하, 창경궁 달빛기행이 있는 날이다. 저들은 왕의 숲길을 걷다가 어둠에 물들어가는 낯선 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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