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않고 집중하는 노력 끝에
청각장애 선수 첫 ATP 본선 승
2회전 랭킹 41위 후르카치 상대

▲ 19일(현지시간) 이덕희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서 열린 ATP 투어 윈스턴세일럼 오픈 단식 본선 1회전에서 헨리 라크소넨을 2대1로 제압하고 전광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S&B 컴퍼니 제공

“청각 장애가 있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청각 장애 3급의 어려움을 딛고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테니스 남자 단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덕희(212위·서울시청)가 이번에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단식 본선에서 생애 첫 승리를 따냈다. 이는 ATP 투어 단식 본선 사상 최초의 청각 장애 선수의 승리 기록이기도 하다.

▲ 이덕희가 ATP 투어 첫 청각 장애 선수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전한 ATP 투어 홈페이지 캡처 장면. ATP 투어 홈페이지 캡처

이덕희는 19일(현지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서 열린 ATP 투어 윈스턴세일럼 오픈(총상금 71만7955달러) 대회 이틀째 단식 본선 1회전에서 헨리 라크소넨(120위·스위스)을 2대0(7-6<7-4> 6-1)으로 제압했다.

1998년생 이덕희는 선천성 청각 장애의 어려움이 있지만 어릴 때부터 ‘테니스 신동’으로 주목받은 선수다.

19살 때인 2017년에 세계 랭킹 130위까지 오른 이덕희는 2014년에는 국제테니스연맹(ITF) 퓨처스 대회에서 16세 1개월의 나이에 우승, 정현(151위·한국체대)이 갖고 있던 국내 최연소 퓨처스 우승 기록(17세 1개월)을 경신했다.

청각 장애를 딛고 투어 무대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노바크 조코비치(1위·세르비아), 라파엘 나달(2위·스페인) 등 세계적인 톱 랭커들이 메이저 대회에서 이덕희를 훈련 파트너로 초청해 격려하기도 했다.

윈스턴세일럼 오픈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덕희와 인터뷰한 영상을 게재하며 ‘ATP 투어 최초의 청각 장애 선수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덕희는 ATP 투어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인터뷰를 통해 “일부 사람들이 저의 장애를 비웃기도 하고, 저는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가족과 친구 등 주위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재 세계 랭킹 212위, 2017년에는 130위까지 올랐던 그는 “오늘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ATP 투어는 “이날 인터뷰는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고, 그 질문을 약혼녀에게 전달하면 그 입 모양을 보고 이덕희가 질문을 파악하는 식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대회 개막을 앞두고 대회 소셜 미디어에 게재된 인터뷰를 통해서는 “아무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다만 누가 아주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경적 정도는 들을 수 있는 정도”라며 “처음 ATP 투어 대회에 나오게 돼 기쁘고 긴장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8월 인도네시아 팔렘방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 선수로는 2006년 도하 대회 이형택 이후 12년 만에 아시안게임 테니스 남자 단식 메달리스트가 된 그는 “더운 날씨를 좋아한다”며 여름에 열리는 이번 대회를 벼르기도 했다.

이덕희는 또 “공이 코트, 라켓에 맞는 소리나 심판 콜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공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상대 몸동작 등을 통해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AFP통신과 로이터통신 등 세계적인 언론사에서도 이날 이덕희의 승리 소식을 별도로 전하며 비중 있게 다뤘다.

테니스뿐 아니라 다른 종목에서도 장애가 있는 선수가 비장애인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테니스에서는 1895년부터 1908년 사이에 윔블던 여자 단식에서 다섯 차례 우승한 샬럿 쿠퍼(영국)가 청각 장애 선수였다.

쿠퍼는 20대 중반부터 귀가 들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윔블던은 출전 선수가 지금과 달리 10여명 남짓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났지만 다른 청각 장애 선수가 일반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덕희의 이날 승리의 가치를 짐작할 만하다.

골프에서는 청각장애 이승만, 발달장애 이승민이 일반인들과 경쟁하고 있고 야구에서는 충주성심학교 청각장애 선수들이 일반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다.

2회전에서 세계 랭킹 41위 후베르트 후르카치(폴란드)를 상대하게 된 이덕희는 “미국이 환경이나 시설이 훌륭하고 음식도 맛있어서 좋은 것 같다”며 “2회전도 오늘처럼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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