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리(古蓮里)는 본래 웅촌(웅하)면 지역으로서 고야(古也), 관(冠), 와지(臥旨), 연답(蓮沓), 반계동(盤溪洞)을 병합한 뒤 고야와 연답의 이름을 따서 고연리라 했다. 고연리에는 현재 반계, 괴천(槐川), 관동(冠洞:와지 연답 포함)등 3개의 행정 리·동과 5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고연리와 양산군 웅상면, 하북면 경계에는 원적산(圓寂山·천성산(千聖山) 원효산(元曉山))이 있다. 향로봉(香爐峰) 기슭의 고연리에는 광활한 신라 고찰인 운흥사(雲興寺) 터가 있다. 원적산은 예로부터 경치가 좋아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과 함께 잇닿은 봉우리와 겹쳐진 뫼뿌리에 골이 깊어 승가(僧家)에서는 천명의 성인이 세상에 나올 곳(千聖出世之地)이라 했고,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승려 천명을 수용한 큰 절을 지었던 자리다.

 어느 날 원효가 시장바닥을 누비며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나에게 맞추어 줄 것인가. 하늘을 고일 기둥을 찍을 터인데"라고 외쳐대니 태종왕이 이 말을 듣고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들이라 명한다. 요석궁 앞 문천교에 이르자 원효는 일부러 강물에 떨어져 옷을 젖게 했다. 관리와 함께 요석궁에 들어가 젖은 옷을 벗었고, 마침내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어 설총을 낳았다. 아기는 벙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아버지인 원효 스님은 하루 밤을 같이 한 이후로는 소식이 묘연해졌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낙산사 바다 굴속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여 사찰을 창건하고 있다고도 하고, 원적산 운흥동천에서 운흥사를 창건해 화엄벌에서 천명의 승려들을 화엄경으로 설법하고 있다고도 했다. 요석공주는 그 곳이 서울인 경주에서 100리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지척인 거리였지만 불가에 귀의한 원효 스님에게 누가 될까 참았으나 설총이 커 갈수록 그리움은 더해만 갔다. 참다못한 공주는 가마를 준비시켜 원효를 찾아 나섰다. 서라벌을 떠나 구량벌-언양-산현-살구정-삽제-동래로 이어지는 대로를 가고자 하여 구량벌을 지날 때, 왕이 알고 공주를 안내하라는 영이 운흥사에 떨어지고 천명의 승려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서라벌에서 살구정까지는 말과 가마를 타고 왔지만 운흥사까지의 흙길을 공주에게 걷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뒷산과 논가에 무진장으로 있는 돌을 깔아 포장하기로 하고 천명의 스님들과 인근의 신도들이 힘을 합해 살구정에서 산문까지의 길에 판석을 깔았다. 조선의 정조(正祖)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한 행차 때에 한강을 건너기 위해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이 때 동원된 선주들에게는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는 대가를 지불했다.

 최근에 결혼비용이 자식 가진 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비용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공주를 위한 운흥사 판석길은 양질의 가공된 반듯한 규격품의 포장도로라기 보다는 겨우 비포장도로를 면한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천명의 인원이 동원된 거대한 토목공사였다. 하지만 동원된 스님들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막상 자신의 딸의 혼수비용에는 인색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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