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막바지 피서 인파가 계곡에 모여들고 있는 와중에 산 기슭에는 벌써 벌초 인파가 등장했다. 지난 23일 처서가 지나가기 무섭게 밤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과연 모기의 입이 삐뚤어졌는지 팔다리를 무는 힘도 약해졌다. 아이들의 물장구치는 소리 너머 산기슭에는 굉음을 내는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다. 벚나무는 이미 노란 잎을 하나 둘씩 떨어뜨리고 있다.

무딘 날 조선낫 들고/ 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깎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벌초’ 전문(이재무)

벌초하는 사람들의 경구 중 하나가 ‘뿌리없는 나무 없고 조상없는 후손 없다’는 것이다. 자손이 있음에도 벌초를 하지 않는 행위는 큰 불효였다.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 한다’는 속담은 아내의 삼촌의 묘에 대해 벌초를 할 때는 대충 눈가림으로만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직계 조상의 묘에 대해서는 모든 정성을 다해 풀을 베고 묘지 주변을 정리했다.

울산의 경우 여러 친척이 모여 벌초 날짜를 정했는데, 웃어른의 묘부터 먼저 했다. 산소에 도착하면 봉분의 앞쪽 아래부터 낫으로 풀을 벴다. 어른들은 봉분을 깎을 때는 꿇어앉아서 깎으라고 가르쳤다. 묘역 전체의 풀을 깎아 내고, 주변의 나무도 손질했다. 벌초가 끝난 다음에는 간단히 주과포(酒果脯)를 차려 놓고 재배했다. 벌초를 하지 않은 이웃 무덤을 보고는 “이 산소 후손은 장관(長官)이라 나랏일이 바빠 묵혔다”고 빈정거렸다.

예초기는 1990년대 초반부터 사용됐다. 그 전에는 순수하게 낫으로만 벌초를 했다.

1980년대 필자는 어른들을 따라 정례적으로 벌초에 참가했다. 4~5명씩 조를 짜 이산 저산을 돌아다니며 벌초를 했는데, 한여름 벌초는 그야말로 죽음이었다. 낫질을 잘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일은 지게에 음식과 술, 숯돌 등 장비와 물품을 가득 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각 산소마다 벌초를 하고 난 뒤 술과 음식을 올렸는데, 산소가 하도 많다보니 음복주에 취해 하루 종일 비몽사몽하기도 했다.

추석 전에는 반드시 벌초를 해야 했다. 사극을 보면 ‘불초(不肖)’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으로,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추석 전에 벌초(伐草)를 하지 못하면 천하의 불초(不肖)가 될 수도 있다.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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