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꽃(김창한作(캔버스에 유채, 50F))-꽃의 치열함이 열매를 만드는가. 수수하고 소박한 사과꽃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읽는다. 과수원을 둘러싼 산의 웅장함과 강의 유려함, 시골마을의 순수함이 알알이 영글어 달콤하고 아름다운 사과를 만들어낸다.

소유는 배타적 권리주장 아니라
한걸음 떨어져 보고 느끼며
완상·완람의 즐거움 추구하는 것
소유에 집착 않음으로써 외려
순간의 진면목에 충실할 수 있어

차를 타고 가는데 나지막한 둔덕에 하얀 꽃무리가 눈부시다. 구름을 두른 듯 몽롱한 꽃빛깔을 보니 배꽃인 것 같다. 둔덕을 따라 배 과수원이 띠처럼 펼쳐져 있다. 일행 중 나이 지긋한 한분이 배 밭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저 배 밭 우리 거야.” “와, 정말요?”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저건 우리 거.” 다른 일행 분이 또 다른 배 밭을 가리키신다. 그러더니 두 분이 나를 보며 깔깔 웃으셨다. “임자가 따로 있나. 보고 즐기는 사람이 임자지.”

아, 이거야말로 우계 성혼의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가 아닌가. 임자가 없으니 누구나 임자가 될 수 있고, 그 중 그걸 가장 잘 감상하고 누리는 사람이 진정한 주인이라는 얘기다. 지인 중에도 시골에 근사한 별장을 지어놓고, 자주 못 가니 필요할 때 마음껏 쓰라고 주변에 말하는 사람이 있다. 별장 주인은 따로 있지만, 관리 문제로 골치를 썩일 필요 없이 별장이 주는 혜택은 주변 사람이 더 크게 보는 셈이니 일거양득, 일석이조요, 주인 아닌 주인인 셈이다.

그저 배꽃을 보고 즐기는 것은 배꽃을 떨어뜨리는 것도, 배나무를 뽑아가는 것도 아니니 배 밭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청풍이나 명월처럼 원래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역시 주인 아닌 주인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찜’을 해두기 시작했다. 거제도 가는 길에 무인도 두엇, 안동 근방의 어린 자작나무들이 하얗게 자라는 야산, 황금 관을 쓴 듯 노랗게 타오르던 영동의 은행나무도 이제 내 소유다.

올해 가장 큰 소득은 밀양의 사과밭을 분양 받은 일이다. 밀양은 얼음골 사과로 워낙 유명한 곳이니 사과밭이 지천이다. 그래서 사과꽃이 절정이라는 4월 말경에 몇몇 글벗들과 사과꽃을 보러 갔다. 그곳에 사는 분의 안내를 받아 들른 사과밭은 약간 언덕바지에 있어서 나지막한 분지를 지나 맞은 편 산기슭까지 굽어볼 수 있었는데, 온통 사과꽃이 흐드러져 멀리서보니 뽀얀 안개가 낀 듯 했다.

이밭의 꽃이 좋아 사진에 담은 뒤 바라보면 저 밭의 꽃은 더 화사하고, 그 옆의 사과꽃은 더 눈부셨다. 꽃밭의 벌이나 나비가 가끔씩 비틀거리며 날 때가 있는데, 아마 꽃의 향기에 취해 그런 것은 아닌지. 우리도 비틀거리며 나는 벌과 나비처럼 이 나무, 저 가지로 레이스 같은 꽃잎과 부케 같은 꽃숭어리를 찾아 돌아다녔다. 봄하늘은 얇은 비단을 두른 듯 푸르고 하얀 구름이 솜처럼 풀어져있어 지상의 사과꽃들이 천상의 호수에 비친 듯 했다. 아니면 밤에만 빛나는 게 서운한 하늘의 별들이 모두 나무 위에 내려와 한낮의 푸름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이 아름다운 꽃이 피는 사과밭이 다 내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마음이 맞는 벗들과 함께 죽란시사란 모임을 만들고 살구꽃이 처음 필 때, 복숭아꽃이 처음 필 때, 참외가 익을 때, 연꽃이 필 때, 국화와 매화가 필 때 붓과 벼루를 들고 만나서 시가를 짓고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 연꽃이 필 땐 이른 새벽에 서소문 밖 연지에 나가 꽃 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연꽃은 동트기 전 일제히 피어나는데, 그 ‘톡’ 하고 피는 소리가 몹시 아름답다고 한다. 연지에 떠 있는 배 위에서 눈을 감고 꽃잎이 공기를 밀어내는 그 미세한 떨림을 느낀다니, 이것이야말로 물아일체의 경지 아닌가. 그래서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들으며 즐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연지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것이다. 거중기를 고안한 실학자이자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아파한 ‘애절양’을 지은 다산에게 이런 섬세함과 풍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소유의 개념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요즘은 집을 꾸미는 고가의 조각품이나 그림, 아이들 장난감 같은 것을 빌려 쓰다가 지루해지면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자동차나 가전제품을 빌리기도 한다. 얼마 전엔 라벤더 꽃밭에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뉴스를 보았다. 보라색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늘어나 입장료가 꽃 판매 대금을 앞섰다고 한다. 소유한다는 것이 내 것으로 만들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떨어져 보고 느끼며 완상과 완람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물아일체, 물심일여의 경지는 아니라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순간의 진면목에 충실할 수 있다. 사실 소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내 것’이라고 마음으로 정해두면 좀 더 애정 어린 눈길로 관심을 두기도 할 것이고.

우리가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왔던 사과꽃도 이미 지고 이제 사과는 부지런히 사과 자체의 붉음을 준비하고 있겠다. 가을엔 우리 사과밭의 사과가 탐스럽게 익었는지 밀양에 다시 가볼까, 아니면 ‘저 사과밭 내 거’ 하는 누군가에게 통 크게 양보를 할까.

▲ 송은숙씨

■송은숙씨는
·2004년 <시사사>로 시 등단
·2017년 <시에>로 수필 등단
·시집 <돌 속의 물고기>, <얼음의 역사>·산문집 <골목은 둥글다>·울산작가상 수상

 

 

 

 

▲ 김창한씨

■김창한씨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대학원 졸업
·개인작품집 발간(도서출판BMK-영문/한글, 2010년)
·1991~2016 개인전 34회(국내외-미국, 호주, 일본)
·2005~2016 아트페어/비엔날레/부스전 10회(국내외)
·2019 개인전 울산문예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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