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실향민입니다. 고향이 이북인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고향땅을 밟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고향을 지척 두고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노진술(73) 광주노씨(光州盧氏) 종친회장이 그리워 하는 고향은 온산공업단지에 삼켜진 울산시 온산읍 대정리 대안마을. 다만 공단 중간에 위치해 있는 안산에서 동네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동네 앞산이었던 안산은 봉우리가 3분의 2 이상이 잘려나가 평평하고 나즈막한 산이 됐다. 정부에서 산을 깎던 도중 환경오염이 더 심해지는 것을 우려해 중간에 작업을 멈췄기 때문이다.

 노진상(59)씨는 "젊었을 때 높다란 안산 앞으로 작은 내가 흐르기도 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안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소쿠리처럼 동그란 동네가 얼마나 정겨웠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공단이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광주노씨 50여가구가 한 동네를 이루고 살았던 대안마을 터에는 현재 (주)풍산(옛 풍산금속) 온산공장이 들어서 있다. 당시에는 노씨들이 사는 동네에 노씨들이 면장을 지내고 노씨가 학교장으로 있다며 "노가면"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비라도 내리면 마당 곳곳에 널린 곡식들을 치울 때도 우리 집, 남의 집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광주노씨들이 대안을 떠난 것은 온산이 1973년 비철금속 제련기지(1972~1981·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6대 전략산업의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온산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1975년 덕신이주단지가 조성되고 1985년 환경오염 이주사업으로 공단조성지역 거주민 이주가 시작되면서 덕신, 울산, 서울, 부산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웃동네 산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영월(산성)엄씨도 비슷한 시기에 흩어졌다.

 노씨들이 대안을 떠나면서 문중 재실 이의재와 울산 입향조 준명의 부인 청주지씨와 후손 등 묘소 9기를 삼평마을로 옮겼다 87년에 옮긴 재실은 300여년된 옛날 건축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광주노씨가 울산에 온 것은 효종 즉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진술 회장은 "정확하게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중구 우정동에 세워져 있는 노준명 할아버지의 청덕비(淸德碑)가 효종1년(1650년)으로 기록돼 있음을 미뤄볼 때 350여년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고 전했다. 또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울산군민이 청덕비를 세운 것으로 봐 군수자격으로 울산에 와서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 말했다.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의 대안(大安)에는 준명의 큰아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씨들의 집성촌이 유지됐다. 현재 10여가구가 살고 있는 울주군 삼동면 작동리에는 준명의 둘째아들 진귀(進龜)가 터를 잡았다. 준명의 셋째아들이 정착한 온산읍 돌당마을은 대안리와 함께 공업단지에 들어가 버렸다.

 전국에 9개의 본관을 가진 노씨의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는 중국 범양 출신이다.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내다가 안녹산의 난(신라 헌강왕 3년·877년)을 피해 아들 9형제를 이끌고 한국으로 이주해 와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했다가 용강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9형제가 각각 광주, 교하, 풍천, 장연, 안동, 안강, 연일, 평양, 곡산에 분파했다. 그리고 다시 교하에서 신창, 광주에서 해주, 안강에서 경주, 평양에서 만경으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대안리에서 자란 노관택씨는 서울대학병원장을 지냈고 그의 동생 노재택씨는 한국은행 감독원을 지냈다. 노용택씨는 전 울산상호신용협동조합 상무로 재직했으며, 노진상씨는 울산역 부역장, 노영구씨는 덕하역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 울산시의원으로 있는 노진달씨는 성균관 유도회 울산시 본부 총무국장으로 있는 노진술 문중회장의 동생이다. 노명택씨는 울산시청 공보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노진락(6급)씨는 회야정수사업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노진국씨와 노직수씨는 육군 대령·중령으로 예편했다. 노정수씨는 온산면 부면장, 노석채씨는 온양면장, 노진일씨는 웅촌면장을 지냈다. 박은정기자 musou@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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