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한 명절, 가족호칭 고민

 

■ 여성가족부가 제안하는 평등하고 행복한 추석명절
명절 가사노동 분담과 배려
여가부 추석 앞두고 캠페인
남편·아내의 형제자매에 대해
이름 불러 친근감 높이자 제안
성별·세대별로 찬반 엇갈려

“가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추석 명절 함께 만들어요!”

여성가족부가 추석을 앞두고 주도한 ‘성평등한 추석명절 보내기 캠페인’ 문구다.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고정된 성역할의 구분 없이 음식 준비, 설거지, 청소 등 명절 가사노동을 함께 하고 서로를 배려하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시행 일주일이 돼가는 이 캠페인은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실천 다짐 댓글달기’가 이어지면서 서서히 확산되는 추세다.

하지만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사람들 중에는 캠페인 중 ‘일부’에 대해 아직도 우리 사회 전통문화와 고정관념에 비춰 시기상조라거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도 적지 않다.

그 ‘일부’ 내용은 명절 때 마다 한 자리에 모이는 가족간 호칭의 문제다. 여가부는 가족간 실천사항으로 ‘도련님’ ‘아가씨’와 같은 전통적인 호칭 대신 당사자의 이름을 부르자고 제안한다. 한 집안의 며느리가 남편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대할 때 ‘도련님~’ ‘아가씨~’하고 부르던 것을 ‘○○씨~’와 같이 이름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한 집안의 사위가 아내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부를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처제’ ‘처남’처럼 가족구성원 간의 관계망으로 상대를 부를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며 친근감을 높이자는 것이다.

 

가족 호칭에 대해서는 지난 설 명절에도 잠시 이슈가 된 적 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올해 초 개선해야 할 성차별 언어와 호칭을 담아 ‘성평등 생활사전’을 내놓았다. 사전에서는 친하다는 의미가 담긴 ‘친가(親家)’와 바깥·타인이라는 의미의 ‘외가(外家)’ 대신 ‘아버지 본가’ ‘어머니 본가’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장인·장모’ ‘시어머니·시아버지’라는 호칭도 처가와 시가 구분 없이 ‘어머님’ ‘아버님’으로, ‘집사람’ ‘안사람’처럼 왜곡된 성역할에서 비롯된 호칭도 ‘배우자’로 일괄 고치자는 것이다.

이번 추석 명절에는 온 가족이 모이는만큼 TV를 보거나 식사를 하게 될 ‘우리집’ 거실이나 안방에서도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결혼 3년 차인 안아미(33·주부)씨에게는 나이 어린 ‘사촌 도련님’이 있다. 올해 5살이다. 도련님이 어리다보니 간혹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본인도 모르게 “누나 일해야 하니깐 나중에 놀아줄게”라고 했을 땐, 집안 어른들 표정이 일제히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씨는 “남편 동생에게 도련님이라는 호칭과 존대말을 써야 하는데, 남편은 제 여동생과 이름을 부르며 오빠 동생처럼 편하게 지낸다. 이런 호칭에 이미 익숙해진 어른들에게는 변화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시도돼야 하는 캠페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소현(32·워킹맘)씨는 대학교 같은 과 선배와 결혼해 6살 아들과 3살 딸을 키우고 있다. 여가부 캠페인에 대해 그는 “도련님·아가씨 대신에 ‘○○씨’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는데 그보다는 형제, 자매처럼 지낼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이 어린 새언니, 나이 많은 아가씨 등으로 인해 호칭이 어색해지고, 어색해진 호칭으로 인해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혹 70~80대 할머니분들이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를 보면 괜히 주변 사람이 민망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며느리도 사위도 모두 한 가족인 만큼 가족 분위기에 맞게 편안하게 호칭을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9살, 6살 두 아이를 둔 아빠 박승웅(42·회사원)씨는 평소에 집안일을 도와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내의 몫이 늘 컸다. 음식 준비 등의 명절 가사노동도 마찬가지. 마음은 있어도 일이 서툴다보니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한켠에 있었다. 이번 추석에는 캠페인이 이뤄지고 있다고 하니 좀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생각 중이다. 하지만 캠페인이 실생활에 스며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는 “가족 호칭은 아직까지 고정 관념이 많이 남아 있다. 캠페인이 좋은 취지인 것은 알겠지만 당장 실천하기는 힘들다. 조금 더 관계가 편해져야 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성한 두 아들을 둔 원은수(70·경상일보시니어기자)씨는 각각 10년, 6년 전 두 며느리를 얻었다. 이번 캠페인을 보면서 며느리들의 호칭을 떠올렸다. 두 며느리는 각각 ‘아주버님’ ‘삼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원씨는 “요즘 제기되는 가족간 호칭문제,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젊었을 때 나도 ‘시댁’ ‘처가’라는 말에서 묘한 불평등이 느껴져 불편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그것이 당연했고,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이런 걸 그냥 두지 않는 것 같다. 가족관계가 더 좋아지는 기회라 여겨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학자인 이동필(72·울산향교전교)씨는 캠페인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전교는 3명의 사위를 뒀고,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 성평등이 시대적 화두라지만, 유학자로서 가족간의 호칭까지 바꾸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전교는 “이름은 본래 아주 소중한 것이다. 성인이 되면 친구간에도 부르지않을 정도로 귀하다. 예로부터 성인식을 하면서 별명과도 같은 자를 지어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임금, 부모, 스승만 가능한 일이다. 서로에게 존칭을 하는 건, 우리의 전통이다. 무릇 전통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성평등 잣대로만 규정해 그 의미를 훼손하는 건 옳지않다. 전통을 지키는 것이 바로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성별과 세대에 따라 호칭을 바꾸자는 제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여가부는 캠페인에 앞서 “설문조사, 사례 공모 및 토론회 등을 통해 가족 호칭에 대한 국민 여론을 수렴해왔고, 전문가 검토를 거쳐 논의를 종합한 결과 이번 성평등 명절 캠페인 일환으로 가족호칭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캠페인의 목적은 온 가족이 행복하고, 그로 인해 사회구성원 모두의 행복지수를 조금이라도 올리는데 있다. 가족간 호칭의 문제는 이번 추석을 기점으로 수면 위로 본격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변화는 강제하기 보다 소통으로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이에 대한 공감대의 정도가 얼마나 두텁게 형성될 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과정이 남은 것 같다. 홍영진·석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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