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근자에 울산의 한 향토사연구자가 울산의병 연구에 중대한 화두를 내놓았다. 논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23일 기박산성에서 박봉수를 비롯한 10인이 창의하고 300여 의병이 모였다. 4월25일 1000여 의병이 모이고, 5월5일 경주의 견천지, 류백춘, 류정이 500여 의병을 이끌고 와 합진했다. 이들은 5월7일 경상좌병영성을 기습하여 많은 병장기를 노획하고 왜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5월15일 신흥사 주지 지운(智雲)이 승병 100여를 이끌고 군량 300석을 싣고 와 의진에 합류했다. 신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명랑조사 문두루비법으로 창건했고, 처음에는 건흥사라 불렀다. 건흥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1646년(인조 24)에 경상좌병사 이급(李伋)이 축언, 축화 두 승려에게 고쳐 짓게 하고 신흥사라 이름지었다.’

하지만 이 연구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먼저 의병 결진은 임란 의병장 이경연(李景淵)의 ‘제월당실기’에 유일하게 실려있는데, 그 장소는 기박산성이 아닌 함월산성으로 되어있다. 이 함월산성이 곧 기박산성이라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또 울·경 연합의병의 병영성 공격도 사실이 아니다. 이 역시 ‘제월당실기’에만 실려있는데, ‘아군이 사면에 매복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성 안의 왜적 수천명이 달아나고, 이들에게 돌멩이를 던져 수백 명을 죽였다’했다. 성벽을 사이에 둔 치열한 공방전은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전투 기록이다. 경주에서 합류했다는 류정의 실기 ‘송호유집’에는 병영성 전투에 관하여 단 한 줄의 기록도 없다. 이렇듯 병영성 공격은 ‘제월당실기’가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전투이다.

명랑조사가 신흥사를 창건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간혹 절의 창건을 유명한 고승과 연결시키는 것은 그 유래를 과장하여 신도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려는 것이다. 석남사를 창건했다는 도의(道義)를 두고 진위 논의가 있는 것이 한 사례이다.

필자는 신흥사를 고쳐 지었다는 1646년이 실상 신흥사 창건을 시작한 해라고 본다. ‘학성지’(1749)는 이 해에 경상좌병사 이급이 인감·혜종 두 승려에게 ‘모연건사(募緣建寺)’ 하게 하고 병영에 종이를 납부하는 역(役)을 부과했다고 기록했다. ‘모연’은 ‘인연(因緣)을 모은다’는 뜻으로 사찰 창건, 불탑 조성 등 불사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재물을 모으는 일을 말한다. ‘건사’는 물론 절을 짓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명백히 신흥사 창건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이 절의 석조 아미타여래 삼존좌상의 본존은 1649년에 조각승 영색이 제작했다 한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니, 신흥사는 착공 3년만에 완공하고 주불(主佛)을 안치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왜란이 일어난지 57년 후의 일이다. 신흥사의 건립 내력이 이러할진대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 참전, 군량미 운송이 가당한 말인가.

이렇듯 이 연구자가 말하는 의병의 병영성 함락, 신흥사 창건과 중건, 지운의 군량미 운송은 모두가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의 논지는 지운을 울산 충의사에 배향하자는데 방점이 찍혀있는데, 지운이 최초로 승병을 창의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밀양 표충사에 있는 사명대사(유정)를 모시는 유교공간(표충서원을 말하는 듯하다)을 예로 들어 충의사에 중을 모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앞에서 본대로 지운도 ‘제월당실기’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다. 이런 그가 어떻게 최초의 승병 창의자가 될 수 있는가. 이런 인물을 어째서 의승도대장, 선교양종판사 사명당에 빗대면서 충의사에 합사하자 하는가. 지면관계로 더 이상 논의를 펼 수 없어 유감이다. 모든 역사연구는 검증된 자료를 통해 사실을 밝히고, 엄정한 학술토론을 거쳐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논지에 이견이 있는 모든 연구자에게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토론을 제의하면서 맺음말을 대신한다.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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