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냉정한 인식·합리적 논리 제시로
일본의 전범 역사 세계에 알려야

▲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지난 9월 초 성남동의 한 영화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주전장(主戰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독립영화 상영관이 없는 울산의 문화환경이 불만스러웠던 터에, 울산인권운동연대가 공동체 상연의 기회를 마련한 덕분이었다.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당일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아마도 대다수 시민들은 공동체 상연 정보를 아예 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원제목은 ‘위안부 문제의 주전장’(The Main Battleground Of The Comfort Women Issue)인데,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 감독이 만들었다. 주 내용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여론전으로, 감독은 일본 우익이 무엇 때문에 이 문제를 그토록 감추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일본 우익의 주장과 미국에서 그것을 앞장서서 퍼뜨리고 있는 미국인 ‘스피커’들의 목소리가 비교적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그들 주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거짓이며, 일본의 국가적 책임은 없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2차대전 직후 미군이 작성한 보고서 등을 근거로 위안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매춘에 종사한 여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또 피해자들의 증언은 일관성이 부족하고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거듭됐다.

그 내용을 반박하기에 앞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주전장이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교과서 왜곡 문제 등 한일 간 다양한 역사갈등은 주로 한일 양국과 그 시민사회가 주 무대였다. 그런데 역사수정주의를 내세운 일본 우익들의 꾸준한 기도에 의해 일본에서는 일본의 전쟁 범죄나 이웃나라에 대한 가해의 역사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기에 이르렀다. ‘한국에는 한국의 역사가 있고 일본에는 일본의 역사가 있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앞세워 국수주의적 역사 서술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보수 정권의 지원 아래 자국 내 역사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우익이 이제 미국(=세계)을 대상으로 여론전을 본격화한 것이다.

우리에게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집단기억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을 일제가 생산하고 주입시킨 자학적 이데올로기와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식민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로 인한 내부 갈등과 사회적 에너지의 소진도 심각했다. 물론 식민지에서도, 독재치하에서도 일상은 지속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갔다. 그렇지만 식민주의 극복의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한 이미지는 수탈적 면모만을 중심으로 극단화된 측면이 있다. 그것을 빌미로 일본 우익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새로운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학에서도 말보다는 기록을 더 신뢰할만한 사료로 인식한다. 또 개인의 기억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회상이나 증언의 신뢰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경험과 기억은 사료에 선행한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설치 운영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그곳에서 속수무책으로 성적 폭력을 당해야 했던 여성들의 존재도 엄연한 사실이다. 생존자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일본 우익이 내세우는 논거는 어이없게도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위안소에서 생존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식의 마녀사냥 논리가 반복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진실’은 있다. 그러나 여성인권을 유린한 전쟁범죄에 대해 ‘나름의 진실’이라는 변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여성의 인권과 삶이 유린되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용인했던 시대와 체제를 반성하기 위해서이다.

이제 역사 해석을 둘러싼 주전장이 바뀌었다. 세계시민을 대상으로 전개되는 역사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입증 가능한 사실을 최대한 수집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보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언어가 요구된다. 피해자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냉정한 인식과 합리적인 논리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주전장’은 바뀐 주전장에서 통할 수 있는 무기의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덧붙이자면, 무슨 무슨 영화제 신설 이전에 이런 독립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제도부터 울산에 만들었으면 좋겠다.

허영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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