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남강을 뒤로 하고 경호강을 지난다. 길은 점점 깊어져 지리산에서 발원한 람천을 끼고 돈다. 물소리 바람소리가 청량하다. 그렇게 남원의 인월과 산내를 지나면 세속은 저만치 멀어진다. 천천히 느슨하게 국도와 지방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더듬어 한참이나 오른다. 그 끝에 불쑥 나타나는 백장암. 아무도 없는 암자의 마당에 발을 디딘다. 완전한 고립이다. 그리고 긴 그림자를 거느린 화강암 석탑과 마주한다. 높이 5m, 국보 제 10호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오후의 햇살이 지붕돌에 고여 어룽어룽 춤을 춘다. 하늘을 향한 찰주도 새뜻한 기운을 모아 부처님의 범어를 들려준다.

삼층석탑은 일반적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이형석탑이다. 형식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석탑이 슬쩍 말을 건다. 신라의 석공은 탑에다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을 온갖 형상으로 돋을새김하였다. 넘치는 상상력과 타고난 재주를 마음껏 발휘해 경배를 올렸다.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진실한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 금강경의 한 구절을 되뇌며 연꽃을 활짝 피우고 부처의 설법을 돌 속에서 꺼내 보였다. 보살을 마주하고 사천왕이며 천인상을 다듬었다. 자르고 썰고 쪼고 갈아내는 절차탁마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았기에 눈부신 부처의 집이 되었다.

▲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2층 몸돌 사면에는 주악천인상이 악기를 연주한다. 비파를 타고 젓대를 분다. 생황, 장구, 바라도 보인다. 여러 악기들이 내는 즐거운 소리는 바로 묘음(妙音)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소리공양으로 불도를 이루고자 했음이다. 향비파를 연주하는 천인상을 오래 들여다보니 현의 울림이 내 몸에 닿아 떨림이 된다. 황급히 몸을 낮춘다.

이 소박한 암자에는 길손의 목을 축여주는 감로수가 있다. 홈통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비파소리로 들린다. 스님은 이 물로 차를 우려 산길을 내달아 온 나에게 말없이 내밀고 통일신라의 걸작인 삼층석탑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수필가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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