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산정(山頂)에서 시작된 소슬바람이 들(野)에 닿으면 들은 아낌없이 억새를 피워낸다. 그래서 억새는 바람을 닮았다. 바람이 거친 계곡에서는 가늘고 예민하나 바람이 순한 들에서 핀 억새는 부드럽고 풍성하다. 들녘 한편 억새의 숲, 바람이 지날 때마다 꺾일 듯 일어서며 너울처럼 억새가 출렁인다. 출렁일 때마다 몸속 깊이 햇살은 파고들어 억새는 햇살에 영글어 간다. 억새는 바람이 피워낸 바람의 꽃이다. 외딴 봉우리 바람이 일 때마다 봉화처럼 피어올라 억새는 바람을 타고 들불처럼 퍼져간다. 드디어 억새의 계절이다.

억새는 억세게 살아남아 억새다. 비바람을 견디며 느리고 더디게 핀, 억새는 슬로우 플라워다. 음식으로 따지면 오랫동안 숙성된 우리 고유의 담백하고 정갈한 맛이 나는 꽃이다. 기름진 땅에서 며칠 만에 속성으로 핀 꽃과는 차원이 다른, 겸손하면서도 수수한, 그리 밝지도 칙칙하지도 않은 꽃.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를 갖춘 이 땅의 꼭 우리 어머니 같은 꽃이다. 억새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은 관계로 여간해서 쓰러지지 않는다. 태풍이 와도 뿌리 채 뽑히는 법도 없다. 억새는 역경을 이겨낸 우리 어머니 같은 꽃이다.(김문찬, ‘억새의 향연’ 경상시론 2013.)

우리는 강렬하게 바라면서 수많은 계획도 세워보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유는 목표에 따르는 역경이 두렵기 때문이다.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역경에 대한 신경을 꺼야 한다.’ (Mark Manson, 신경 끄기의 기술, 겔리온 2018). 신경을 끈다는 것은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목표에 따르는 역경에 예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뽕나무는 태풍이 예상 되거나 다가오는 겨울 많은 눈이 예상되면 싹을 더 빨리 길게 내민다고 한다. 식물이 두려움에 대응하는 행동방식이다. 두려움을 날려버리는 가장 좋은 수단은 실천에 옮기는 행동임을 우리는 식물에게서 배운다.

억새가 한창이다. 억새는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억새는 주저 없이 바람을 불러들이고 바람은 끊임없이 억새를 이끌며 나아간다. 이끌고 불러들이는 4차원의 시공간을 우리는 볼 수 없지만 억새의 숲에는 늘 바람이 인다. 억새는 바람을 따라 춤추고 바람을 따라 출렁이며 바람에 영그는 바람의 꽃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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