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소녀 집안서 피살…야외 아니고 시그니처 없는 등 화성살인과 차이

▲ 지난 2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5층 회의실에서 반기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이 비공개 브리핑에 앞서 취재진에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체모내 티타늄 방사성동위원소 감정결과, 국내 사법사상 첫 증거 채택
농기계 수리공 붙잡아 무기징역 선고…감형뒤 2009년 가석방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았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범인이 붙잡혀 모방 범죄 혹은 별개의 범죄로 분류된 제8차 사건을 빼고 9차례나 이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의미했다.

8차 사건은 당시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 의뢰한 체모 방사성동위원소 감정 결과가 국내 사법사상 처음으로 재판 증거로 채택돼 화제를 모았다.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한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은 체모 등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 등을 분석해 용의자의 것이 맞는지 판단하는 방법이다.

감정 결과를 토대로 검거된 윤모(당시 22세·농기계 수리공)씨도 수사기관 조사에서 범행을 털어놓아 사건은 해결된 듯했다.

그러나 윤 씨 검거 이후 30년이 지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이춘재(56) 씨가 이렇듯 과학적 기법으로 조사가 이뤄진 8차 사건마저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서 혼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윤 씨가 이 사건으로 수감된 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취지의 옥중 인터뷰를 한 사실까지 뒤늦게 알려지면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화성 8차 사건은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9월 16일 오전 6시 50분께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 살던 박모(당시 13세)양이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양의 어머니는 학교 갈 시간이 됐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딸을 깨우러 갔다가 하의가 벗겨진 채 숨져있는 박 양을 발견했다.

피해자 목에는 누군가 조른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신체에서 발견된 흉기 흔적은 없었다.

이 사건 범행 수법만 놓고 보면 피해자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옷가지로 매듭을 만들어 손발을 묶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시그니처’(범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언론은 화성에 거주하는 10대 여성이 성폭행 피해를 보고 살해당했다는 이유 등으로 화성 사건 리스트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선 1∼7차 화성 사건처럼 범인도 한동안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이 현장에서 발견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모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 분석 결과를 받으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으로부터 체모의 혈액형이 B형이며, 체모에 다량의 티타늄이 함유됐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후 경찰은 화성 일대에서 티타늄을 사용하는 생산업체 종업원 가운데 혈액형이 B형인 사람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의 체모가 채취됐는데 경찰이 의뢰한 동위원소 성분이 윤 씨의 것과 일치된다는 답변을 받고 사건 발생 이듬해인 1989년 7월 그를 피의자로 검거했다.

이 사건을 다룬 그때 언론 보도를 보면 윤 씨는 경찰 조사에서 “내 몸이 불구라는 신체적 특징 때문에 피해자가 고발하면 쉽게 경찰에 잡힐 거라는 생각에 살해했다”고 범행을 인정했다. 

연합뉴스가 입수한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수원지법은 1989년 10월 윤 씨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체모와 윤씨의 체모가 일치한다는 국과수의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감별법에 의한 감정 결과를 국내 사법사상 처음으로 증거로 채택해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경찰과 검찰에서 자백한 내용을 법정에서도 일관했다”며 “피고인이 단순 강간치사가 아닌 피해자를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고 살인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윤 씨는 2003년 5월 시사저널과 진행한 옥중 인터뷰에서 “나는 8차 사건 범인이 아니다”라고 호소한 바 있다. 

그는 “직업이 농기계 용접공이었을 뿐 우연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구구절절 묘사하기 싫다”며 “나처럼 돈도 없고 연줄도 없는 놈이 어디다 하소연하나. 나는 국선 변호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윤 씨는 피살자 오빠와는 친구 사이며 여동생을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윤 씨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0년으로 감형돼 2010년에 석방될 예정이었다가 한해 앞당긴 2009년에 가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관계자는 “윤 씨는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이지 않다”고 말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이춘재 씨 진술의 신빙성을 검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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