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1)

▲ 그리스인들은 정치·경제·종교적인 시민공동체인 폴리스(polis)라는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도시의 높은 위치에 요새를 짓고 거기에 신전을 세워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 불렀다. 황혼의 아크로폴리스가 신화처럼 붉은 빛을 토하고 있다.

도시국가 폴리스의 언덕위 요새같은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성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신성함은 여전해
거룩함을 잃어버린 현대도시와 대비

겨울의 아테네는 ‘음울한 장조’를 띤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헤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속살처럼 쪼들린 살림살이가 찬바람을 맞는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생기 없는 무표정이 거리풍경을 더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산티그마 광장을 메우던 시위대들의 함성도 메케한 최루탄 냄새도 오늘은 만날 수 없다. 체념으로 얻어진 자유의 몸짓, 골목틈새로 흘러나오는 죠르바 댄스조차 오늘은 관객 없는 버스킹처럼 처량하다.

아테네만큼 시간의 간극이 극단적인 도시가 또 있을까? 신화처럼 신비로운 고대와 안쓰러울 정도로 피폐한 현대, 그 사이 어떤 연속성도 없이 2500여년의 공백을 넘어 공존한다. 여행자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5세기 이전의 아테네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폐허나 다름이 없는 유적 속에서 철학과 과학, 신화와 종교, 문학과 예술, 그리고 민주제도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구문명의 토대를 만들었던 고대 아테네인들의 모습을 발견하려 한다. 21세기의 아테네는 고작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는데 쓰일 뿐이다.

에게해 연안의 항구와 수많은 섬들, 자신들을 헬라인(Hellenes)이라고 부르던 그리스 선조들이 정착했던 터전이었다. 지중해의 동쪽, 발칸반도와 오늘날 터키에 속하는 아나톨리아 사이의 바다를 에게해라고 부른다. 남쪽으로는 크레타 섬 사이로 북아프리카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아시아에 접하며, 북쪽으로는 마르마라해를 통해 흑해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지리적 환경이다. 그 호수 같은 바다 안에 수 천 개의 섬들이 육지에서 털어낸 조각들처럼 촘촘하게 박혀있는 것도 지중해의 여타 바다와 다른 점이다.

그곳은 온갖 신화와 역사가 범벅이 되어 있는 곳. 오늘날에야 그리스 영토와 영해에 속하겠지만 긴 시간의 안목으로 보면 장터처럼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 갔던 공간이다. 이미 기원전 수 천 년 전부터 이집트와 페니키아인들의 해상활동무대였고, 트로이전쟁이 일어났으며, 페르시아에 속하기도 했고, 그리스와 로마를 거처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망라하는 수많은 민족들의 생활무대였다. 그 선진문명들이 젖줄이 되어 그리스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육지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문명을 구분하는 역사관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일깨워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천년 전부터 폴리스(polis)라는 도시국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폴리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경제·종교적인 시민공동체였다. 도시의 높은 위치에는 요새를 짓고 거기에 신전을 세웠다. 이를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고 불렀으니 이는 아테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전에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호신을 모셨다. 마치 동네 뒷산의 산신처럼 아크로폴리스는 시민들에게 종교적 귀속성과 방어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는 성소였다.

헬라인들은 에게해 일대를 돌아다니며 식민지를 개척하고 수많은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들은 언어, 종교, 문화유산의 일체감을 가졌지만 이들이 세운 도시국가들은 각기 독특한 문화와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다.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세력에 대해서는 헬라인으로서 연대하는 독특한 형태의 도시국가연맹을 만든 것이다.

아테네도 그 도시국가 중의 하나였다. 민주제도라는 탁월한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아테네는 그 연맹의 맹주가 될 만큼 성장했다. 아테네의 주도하에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침략해 온 페르시아 대군을 무찔러 승리할 수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로 우뚝 솟았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폴리스 시대를 유추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 높이가 150m에 불과한 언덕이지만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적 기념비이며 랜드마크다. 아크로폴리스가 없었다면 고대 그리스도, 아테네도 이야기로만 전해질 것이다. 그저 도시 한가운데 불쑥 솟은 특이한 지형 때문만은 아니다. 그 언덕을 돌아 성벽을 쌓고 신전을 세워 신성한 장소로 만들었던 아테네인들의 의지와 의미가 내재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스러움을 드러나게 하는 행위, 즉 ‘성현(聖顯 hierophany)’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의 ‘윗마을’에 해당한다. 그곳이 신이 사는 성스러운 공간이라면, 언덕 밑의 ‘아랫마을’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속적 공간이다. 그것은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연결된 공간이다. 윗마을의 수호신은 아랫마을의 주민을 일상적으로 굽어 살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아랫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윗마을 수호신을 통해 하늘의 신국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두려움과 매혹이 동시에 전개되는 신비’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아크로폴리스는 세속의 공간을 거룩하게 만드는 상징이었다.

황혼의 아크로폴리스는 신화처럼 붉은 빛을 토한다. 그들이 믿던 신들은 오래 전에 떠나갔지만 그 장소는 여전히 경이롭다. 언덕 아래 그 후손들도 여전히 그 신성함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역사와 세월이 주는 연륜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지형과 장소가 내뿜는 기운 때문일까. 아크로폴리스 없는 아테네는 결코 아테네가 아니다.

현대도시에서 장소의 거룩함을 찾아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장소성의 근원이 되었던 산들, 개발업자들에게는 토지이용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불도저의 굉음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산은 평지가 되고, 장소성은 해체된다. 역사와 전설이 사라지고, 동네사람들 묶어주던 산신도 사라진다. 그 자리에 군림하듯 치솟은 고층빌딩은 ‘자본의 거룩함’을 과시한다. 무엇이 전근대적 미신일까.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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