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의 유산은 디자인정신
조선 의관이 한국 전통될 수 없어
정신과 외양 심각한 불일치 현상

▲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올해가 바우하우스 100년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늦었던 산업혁명지각생 독일을 디자인우등생으로 이끈 디자인교육기관, 바우하우스는 예수같은 존재라서 큰 행사가 많다. 특히 제조업강국 독일을 우상시하는 우리 대한민국이니, 떠들썩한 온갖 기념 전시, 출판, 세미나로 가득한 한해다. 20세기 초 한 디자인 교육-연구기관 설립의 숭고한 이념과 그 선각자들의 언행, 토시 하나하나를 기리고 해석하는 난리통은 바우하우스디자인교(?)라는 종교가 아닌가 생각이 들 지경이다.

대상에 대한 전방위 연구를 통해 원리를 찾고 규칙을 정립하는 것은 해당분야 연구자, 학자의 소명이다. 바우하우스부터 수많은 디자인연구자, 학자들의 노력으로 쌓인 100년연구의 수혜를 받아, 그래서 필자도 대학생 시절, 디자인사를 배우며 바우하우스의 존재와 의미, 역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좋은 디자인을 찾고, 만드는 방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디자인은 더 이상 바우하우스의 것이나 100년의 연구유산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오늘의 그 어떤 자동차, 제품도 바우하우스를 재현하는 오마주는 없다. 점점 더 빠르고 복잡하고 변수많은 미래를 상대하는 21세기의 실무 디자이너에게, 100년된 바우하우스는 ‘덧샘뺄샘’같은 당연한 하나의 원리일 뿐이다. 죽은자식 불알을 만지고 있을 여유가 없다. 덧샘뺄샘 모르는 수학자나 만유인력을 모르는 물리학자가 없듯, 바우하우스를 모르는 디자이너가 어디 있을까? 바우하우스로부터 계승할 핵심은 ‘박제된 현상’이 아니라 ‘선각적 정신’이다. 그러니 무식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대한민국이 굳이 바우하우스 100년이라며 난리법석 안해도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디자인연구자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바우하우스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기신문연재까지 내고 있다. 원조 독일이나 그 후신 미국이 오히려 훨씬 조용하다.

놀랍게도 똑같은 사례가 우리 일상에 하나 있다. ‘조선’과 ‘대한민국’사이의 착시현상이다. 울긋불긋한 조선시대 군관복장의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광화문은 서울관광의 필수코스다. 형형색색 튀는 스타일 한복차림 남녀로 붐비는 고궁모습이 전통복식을 위배해서, 아름답지 못하다는 개탄과 전통한복차림만 고궁입장에 혜택을 주라는 목소리도 수시로 들린다. TV속 청와대 국빈영접에서 조선시대 임금님 행차같은 의전도 참 많이 익숙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시라. 조선왕조 깃발과 꿩깃털관모, 노란 도포차림으로 태평소 풍악을 울리며 행진하는 군악대, 구슬 꿴 갓끈과 울긋불긋한 군관포입은 의장대 사열이 과연 21세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모습인가? 단번에 들어오는 흔한 반박! “우리의 전통의례다, 다른 나라도 그렇다”는 식이다. No! 완벽한 착각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조선왕국도 대한제국도 아니다.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분야 그 어느 것도 대한민국에 그대로 답습된 것은 없다. 왕이나 신분차별을 인정하는 계급제도도 없거니와,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도 전혀 다르다. 그런데 왜 유독 눈에 보이는 복식, 문양이나 의관, 의례는 악착같이 답습해 쓰려고 하나? 영국이나 스웨덴의 왕실 근위병이나 사열식을 근거로 반문하지만, 그 나라들은 비록 민주주의 체제일지라도 말 그대로 입헌군주국, 수백년을 지속중인 ‘왕국’의 겉모습이기 때문에 왕국의 전통복식과 의관을 갖춘 의례를 국가 행사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키높이 시커먼 털모자를 쓰고, 울긋불긋한 군복에 칼을 찬 근위병이 화려한 문장깃발을 주고받으며 교대식을 하고, 국빈행사에서 각국 정상이 로맨틱한 왕실마차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 공화국 미국에서 땋은 머리, 옛 영국총독 휘하 식민지 미국군대 차림, 공산국가 중국에서 청나라 복식과 의관, 공화국 프랑스에서 루이14세 스타일의 프랑스군 사열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이전과 체제를 달리하는 나라는 과거시대의 의관이나 문양, 복식을 쓰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환경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설임을 고려할 때, 환경을 인식하는 인간의 감각, 시각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앓고 있는 대한민국 전반의 정체성혼란 또한 정신과 겉모습이 미스매치(miss matching)된 ‘시각적 착시’ 몫도 꽤 크지 않을까?

바우하우스로부터 21세기디자인으로 계승할 대상은 아무개가 무엇을 무엇이라 한 정의나 법칙 따위 ‘박제된 현상’이 아니라 혁신을 열망하는 ‘정신’이다. 조선으로부터 대한민국으로 계승할 대상 또한 복식, 의관, 의례 따위 ‘박제된 겉모습’이 아니라 번영과 행복을 열망하는 ‘정신’이다.

내 주위에 100년전 바우하우스의 화석이나, 조선시대 울긋불긋 도포차림같은 ‘착시’가 없는가? 당장 살펴볼 뜨끔한 일이다.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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