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광복절에 서부경남 3·1운동 때 신호용 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항일투사의 손자 한명이 종소리가 아닌 나팔로 신호했다고 말해 아래의 내용을 밝히고자 한다.

 〈고등경찰관계적록〉에 "박진환 등이 3월18일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독립만세를 외쳤다"라고 분명히 기록돼 있다.

 3·1운동 당시 광림학교 교사이며 제자인 악대원, 이역규 등을 지도했고 해방후 3·1동지회 회장이었던 한규상(건국훈장 애족장 받음) 선생의 회고록 〈나의 조국 나의 교회〉란 1980년에 발간된 책에도 다음의 내용이 있다.

 "3월18일 정오에 시내를 5구로 대기하다가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라고 했다.

 또 1960년에 3·1운동을 회상하면서 기록한 〈3·1운동의 몇가지 특이성〉이란 글에 의하면 "3월18일 12시에 예배당 타종을 신호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라고 했다.

 5구 중 다른 4곳에 있었던 군중들은 장날과 2만 군중 소리에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행진할 때 나팔소리만 듣고 오해가 생겼을 것이다.

 창원출신 변지섭 선생이 1966년에 발행한 〈경남독립운동소사〉와 1969년에 울산출신 이용락 선생의 〈3·1운동실록〉부터 잘못 기재되기 시작했다. 잘못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주선교회에서 사립학교를 설립하려 하자 김영조는 선교회와 자주 접촉을 가지고 이영규는 전답을 처분해 기증하고 남해에서 악기를 구입해 악대를 조직했다"며 "악대수익금으로 학교를 세워 경영했고 자신들의 악기로 3·1운동 신호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광림학교 전신인 안동학교를 설립할 때 김영조, 이영규는 7~8세 어린이였고 광림학교로 발전할 때도 10~11세 어린이였다.

 1930년대 발행된 〈진주교회 25년사〉에 보면 거열휴 선교사가 박성애, 안확, 강주식 등의 발기로 학교를 세웠다 했고 경남일보 1910년 2월4일자에는 인가된 사립학교는 광림학교 뿐임을 보도했다.

 그러므로 김영조, 이영규 어린이 2명이 학교를 세우고 악기를 구입해 3·1운동 때 자신들의 악기로 신호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부산·경남 3·1운동사〉,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도 나팔로 신호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앞선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으므로 잘못된 내용이다. 이 책의 편찬 당시 진주지역 자료수집 위원은 3·1운동 당시 6세였던 분 등 2명이었다. 그러므로 더욱더 신빙성이 없다.

 종의 제작안내 등에 대해서는 순천대 최인선 교수의 소견서에 종의 현상태의 모습 등을 볼 때 1919년 이전에 제작돼 1922년에 산청군 단계리 교회로 옮겼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진주 3·1운동은 진주교회 종소리로 시작한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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