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②
광장 문화의 시초 아테네 ‘아고라’
시민들 모이는 집회와 소통의 공간
민주화 성숙위해 도시공간 변화해야
여의도광장도 진화된 소통의 역할을
많은 도시국가 가운데 아테네가 그리스 제국의 패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정도의 일이다. 많은 폴리스들을 이끄는 맹주가 되어 세계 최강의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강력한 통치력, 막강한 군대를 보유했던 스파르타를 제치고 어떻게 맹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다른 폴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제도로 정착시킨 최초의 민족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요건은 구성원의 평등성이다. 그들은 혈연이나 지연적 특권을 배제한 행정단위로서 데모스(demos)를 만들어 그 초석을 놓았다. 각 행정단위에서 선발한 대표들로 협의회를 조직하여 국사를 논의하게 했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민주정치의 실현으로 국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애국심의 바탕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크로폴리스에서 피라이우스 항구 방향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두 개의 언덕이 서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프닉스 언덕, ‘사람이 많아서 숨 막히는’이라는 뜻을 갖는 이 장소에서 국가대사의 정치적 토론과 투표가 이루어졌다. 아테네 시민 6000명이 1년에 40회 정도 모여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고 한다. 일 없는 아테네 시민 대다수가 참가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려 2500년전에 직접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다.
언덕 아래에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모이는 아고라가 들어섰다. 아크로폴리스가 신들의 영역이라면 아고라는 시민의 일상적 영역이다. 그들은 우리의 고조선 시대부터 이미 광장을 만들었다. 아고라(agora), 그곳은 ‘모이는(아게이로)’ 곳을 의미한다. 시민들이 모여 물건을 교환하고 생각을 나누는 집회와 소통의 공간이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거기에서 꽃을 피웠다. 동북아시아 문명권에서 보기 어려운 광장의 문화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우거진 숲속에 폐허의 유적들만 널브러져 있지만 옛 모습을 상상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아고라의 중심에는 광장이 있었다. 가로 550m, 세로 700m 크기의 직사각형 광장을 두고 삼면을 주랑으로 에워쌌다. 광장은 집회나 재판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연극무대나 운동장이 되기도 했다. 주변에는 공공건물이나 분수, 조각상 등이 설치되었다. 많은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늘날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 신전뿐이다.
광장 주변에 주랑(柱廊)이 있는 긴 건물들을 스토아(stoa)라고 불렀다. 주로 상점이 들어서는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광장 쪽으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처마를 두었다. 아무리 기후가 좋은 아테네라도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지붕이 있는 주랑(柱廊)은 이러한 용도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탑골 공원의 팔각정에 해당한다고 할까. 시민들이 만나서 상품과 의견을 교환하고, 한담을 즐기고,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주장했다.
가난한 철학자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고 가르칠 수 있는 학문과 교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스토아 학파라는 철학도 바로 이 건물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공개적으로 논쟁과 비판이 자유로운 광장에서 철학과 학문이 탄생한 것이다.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이었던 서원이나 향교와 얼마나 다른가. 교조주의적이고 폐쇄적인 공간 환경과 학문의 방식이 너무도 닮아 있다.
광장 옆 새로 복원한 스토아(Stoa of Atalos)는 당시의 아고라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그 안에 돌로 만든 추첨기계(Kleroteria)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공정하게 배심원을 선정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시민의 상식적 판단을 전문가의 법 해석보다 중요시 여기는 배심원 제도를 두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배심원을 무작위로 선정하는 장치를 두었다는 점에서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아고라에 앉아 우리네 시청 앞 광장을 생각한다. 시청 앞 광장이 오늘날처럼 시민들의 소통공간이 된 것도 불과 십 수 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 역사에서 관청 앞마당은 지배 권력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공간이었다. 지배자의 일방적인 포고령이나 범죄자의 공개처형 따위가 행해졌다. 백성들은 북과 징을 두드려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허용된 장소는 광장이 아니라 거리였다. 거리를 중심으로 했던 동북아시아의 도시와 광장을 중심을 했던 유럽의 도시가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던 배경이다.
봉건사회 이래 독재 권력은 백성들이 모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전통도시에서 백성들에게 허용된 사회적 공간은 거리뿐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널찍한 가로를 갖는 한양에서 조차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체 높은 나리들의 행차가 있을 때 마다 비켜서야 했으니 백성들은 좁은 뒷골목으로 피해 다니는 것이 속편한 일이었다. 말을 피할 수 있는 뒷골목, 피맛골(避馬)은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허용된 그나마 안전한 보행로였다.
근대화이후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도시공간도 있었다. 여의도 광장, 그곳은 정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집회나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던 공간이었다. 그 삭막하고 거대한 공간의 권력은 여전히 백성들의 일상적이고 자발적인 모임을 거부하고 있다. 우매한 군중들의 민주사회가 성숙하려면 광장의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마당에 멍석을 까는 것처럼 ‘도시공간의 민주화’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