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동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부산쪽으로 얼마 가지 않으면 문수산의 동쪽 입구인 울주군 웅촌면 율리를 만난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오른 쪽에 문수분교 안내 입간판이 보이고 신호등을 만난다. 1차선에서 신호를 받아 왼쪽에 나 있는 샛길로 접어들면 남평문씨(南平文氏)들이 모여 살고 있는 수문(殊門)마을을 찾아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군 지역 여느마을의 진입로와는 달리 시멘트 포장에 겨우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어서 제대로 찾아왔나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입구를 제대로 찾았기에 곶장 길따라 가면 된다.

 문수산(門殊山)의 문수를 뒤집어 마을이름을 딴 수문마을은 마을 이름답게 문수산을 뒤로 하고 있다.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금새 만나는 경사가 가파른 꼬불꼬불한 고갯길만 넘으면 좌우로 길게 늘어선 낮은 산들 사이로 좁고 긴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띠엄띠엄 낮은 집들도 보인다. 바로 수문마을이다. 수문마을은 이곳에서부터 청량면 개곡리까지다.

 마을의 처음과 끝이 10리 4㎞에 이르러 문죽리 자연마을 가운데 가장 긴 수문마을에는 현재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둘레둘레 모여산다는 의미가 무색한 마을이다. 약 4㎞에 이르는 좁은 골에 집들이 군데군데 있다. 그래서 마을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다. 울산~부산간 고속도로 공사가 마을입구에서 한창이지만 주민들로서는 남의 일이다. 집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아마 산들 사이의 좁은 골을 따라 농사를 짓고 옛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논과 가까이 집을 마련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수문에 남평문씨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부터다. 청도에 살던 시조 문다성의 38대손인 모당(慕堂) 문정호(文貞好) 할아버지가 이 곳으로 터를 잡으면서부터로 지금은 울산지역에서 남평문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됐다. 수문마을의 남평문씨들은 여안공파에 속한다. 수문마을은 남평문씨 여안공파의 울산 최대 집성촌인 셈이다. 수문문중은 마을 회관 북쪽에 모당재(慕堂齋)를 짓고 매년 음력 10월 둘째 일요일에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시조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인 472년 남평현(현재 전남 나주군 남평면) 군주가 장자지라는 연못가 바위 옆에서 놀고 있을 때 바위 위에서 오색기운이 감돌면서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돌로된 함안에 피부가 백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 아이가 있어 성을 문이라하고 이름을 다성이라고 해 키웠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m쯤 되는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문암"이라는 비석을 세워놓고 있어 문씨 시조의 탄생지임을 알리고 있다.

 입향조의 10대손인 문경탁(78·전 종친회장)씨는 "예전에는 한 20여집이 있었는데 요즘은 14집만 남았지만 그래도 울산에서는 문가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입향조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그래도 12대를 이어오며 이 수문마을에 문씨들이 살고 있으며 300여 가구가 울산과 부산, 서울 등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게 경탁씨의 설명이다.

 마을 초입의 유료낚시터는 수문못으로 일제시대 대단위로 보강된 것이다. 논농사가 전부였던 수문마을 주민들은 해방 이후 배나무를 들여와 경작하기 시작해 마을의 언덕배기에는 배과수원이 아니면 얼마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감나무밭들이다.

 범서정수장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문동현씨와 국세청과장으로 재직하다가 울산세무서 앞에서 세무사 사무실을 열고 있는 문규호씨가 이 마을 출신이다. 문경학 화봉중학교 교감, 문경기 전 애경유화 중대장, 문성현 해운대구청 세무과장 전 서울문화방송 프로듀서 문희연씨가 수문마을에서 자랐다. 문규진 부산교육대학 교수, 문정환 변호사도 수문문중이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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