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이면에는 언제나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과는 다른 사실관계들이 얽혀있기 마련이다. 하나의 큰 문제로 인해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소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어 변화를 일으킨 경우가 대다수다. 1977년의 광명단 파동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단편적으로는 연료를 절감하려는 옹기업자에 의해 의도된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그 배경에는 당시의 시대적 요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광명단 파동 사건이 생기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산림은 민둥산이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토가 황폐해졌고, 난방과 취사 문제로 산림은 급속도로 훼손됐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산림법을 제정했고, 산림 보호법에 따른 조치는 벌목에 대한 금지로 이어졌다. 이 같은 조치는 나무를 1차 재료로 사용하던 옹기업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 결과 가마에 불을 지피는 나무는 물론 잿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도 공급받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옹기업자들도 처음에는 소나무재만을 사용하여 재를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점차 어려워지자 잡재(雜木灰)를 섞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곧 잡재는 높은 온도에서도 잘 녹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결국, 작은 방법을 고안했던 것이 바로 기본잿물에 소량의 광명단을 섞어 사용하는 것이었다. 광명단이 잡재를 빨리 녹도록 도와줬기 때문에 연료비나 시간, 인건비 모든 면에서 쉬워졌다.

하지만 광명단에 함유된 납 성분은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문제의 여지를 안고 있었고, 마침내는 인체에 무해하다는 대법원의 판결로 마무리를 지었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전체의 옹기업자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광명단 사건은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옹기와 관련된 역사의 한 오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변화해 가는 시대적인 요청 속에서 나름의 탈출구를 모색한 일련의 사건으로 정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울산옹기박물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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