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웅 전 울산여고 교장

오늘은 외할머님의 ‘53주기 기일’입니다. 이렇게 조용한 시간이면, 누군가를 잊는다는 것이 불안해집니다. 사랑하고 존경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에 인생의 구심점이 되어주신 외할머님.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이지만 여전히 외할머님은 나의 어머니이고, 외갓집은 마음 속 고향입니다. 외가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외할머님을 엄마라 부르며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님! 누구나 다들 세월이 가면 부모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법입니다만, 저도 어느새 손자를 두었습니다. 손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당신의 뜻이 저에겐 한없이 큰 빛이었다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엔 아무리 짜내도, 퍼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신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오전에 뒷밭에서 일하시고, 점심 잘 드시고 셋째 손자를 품에 안으시고 평안한 잠결에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짧지만 모두에게 소중한 삶을 사셨기에 아무나 누리지 못하는 죽음의 복을 받으셨다고 합니다만,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가족들에겐, 그리고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모두에겐 슬픔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할머님! 운명하시기 3개월 전 당신은 저에게 무슨 걱정,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셨는지 여름방학 중 대운산 자락 등잔골 암자에 머물고 있었을 때, 불편한 몸으로 그 멀고 힘든 길을 찾아 오셨습니다. 길을 몰라 친구분을 대동하시고 말입니다.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가실 날을 이미 알고, 이 못난 외손자를 마지막 보고 싶어, 마음으로나마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셨기에 찾아 오셨다는 것을 운명하신 뒤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잠시 머물다, 손 한번 꼭 잡아주시고 가셨지만, 그 묵언 속에는 당신의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 말씀을 지금까지도 큰 교훈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날, 절 아래 큰길까지 당신을 배웅하면서 그 시간이 마지막이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모시 한복을 입은 당신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멀리서 뒤를 돌아보시는 당신의 마지막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그날 처음으로 이상하리만큼 한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분명 신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당신은 분명 범인이 아니십니다.

외할머님!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고, 당신이 주신 무한한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좋은 일, 궂은 일 있을 때마다 당신이 계신 대운산 옥수골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은 항상 미타암, 천성산 정상이 바로 보이는 당신에게 가 있습니다. 이 시간이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엄숙한 시간이니까요. 외할머님! 날씨가 추워지는군요. 시간 내어 찾아뵙겠습니다. 한없는 당신의 귀하고 아름다웠던 삶을 되돌아보는 이 시간이 행복하며, 이렇게 당신의 깊은 사랑을 만나 한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근심 걱정 잊으시고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이 외손자 두 손 모아 비옵니다.

이동웅 전 울산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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