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동뮤지션의 노래 속 가사 보며
상식·이성이 앞서는 세대임 실감
조국사태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길

▲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붉은 벚나무 단풍이 노란 햇살에 반짝이는 아침 출근길. 요즘 인기곡 악동뮤지션(악뮤)의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를 듣는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오누이가 부르는 긴 이름의 발라드곡인데, 흐느끼지도 내지르지도 않으면서 애잔한 감정에 젖게 한다. 이별 앞에서 매달리거나 원망하거나 화난 감정을 쏟아내는 노래에 비해 편하게 들린다. 가사도 모호하거나 지나치지 않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포기하고 아파할 수 없다’는 당연한 말이 와 닿는다. ‘일부러 몇 발자국 물러나 내가 없이 혼자 걷는 널 바라본다’는 대목에선 이별 느낌을 미리 상상해보는 조심스럽고 성숙한 자세도 엿보인다.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별일 텐데’라며 이별의 고통을 피하자고 설득한다.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노랫말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문득 30년 전 조정현의 명곡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가 떠오른다. ‘그대 향한 그리움은 나만의 것인데 외로움에 가슴 아파도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라는 절절한 가사는 당시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때는 왜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고통을 감수하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을까. 현실에서 못 이룬 사랑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체념의 미학, 한(恨)의 정서가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사랑의 감정은 너무도 위대해서 아픔마저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일까?

시와 노래에서 자유롭게 표현되는 모순과 역설은 신선한 감동을 준다. 논리에 안 맞는 문구도 멋있어 보인다. 하지만 예술에서 허용되는 시적 자유가 현실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멋진 예술적 표현도 현실 앞에선 일단 멈춘다. 늦가을 아침 발라드를 들으며 걷다가 직장에 도착하면 나는 노래에 젖었던 기분을 잠시 추스르고 현실 모드로 넘어간다.

삶이 어려워 이성보다 느낌을 중시하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돌이켜보면 과거 586세대는 발라드의 비합리적 문법을 현실에서도 받아들였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남자는 특권과 책임을 떠안았고,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편법을 쓰는 걸 당연시했다. 안보를 위해서 자유와 민주를 희생했고, 민주화를 한다면서 권위적 방식과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모순투성이 현실에 익숙하다보니 노랫말의 모순된 문구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을까.

이제 세상엔 상식과 이성이 자리 잡고 있다. 대의를 위한다고 편법과 불공정이 합리화되지 않는다. 악뮤의 세대는 남북 화해를 위해서 운동선수 개인이 왜 양보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노랫말에서 모호한 이유로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영 어색하다.

올여름 벌어진 조국 사태의 경과를 보면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던 과거 시절이 떠오른다. 조사 결과 드러난 잘못은 명백하다. 입시제도의 결함과 자식을 아끼는 부모 심정을 감안해도 공문서 위조는 흔한 일이 아니다. 공직자의 주식투자를 감시해야 하는 민정수석이 부인의 부적절한 투자를 몰랐다는 것도 납득이 안 된다. 문제는 그가 처음에 공언한 대로 수사에 협력하여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흘러간 발라드의 모호하고 감상적인 표현 뒤에 숨으려 한다는 점이다.

조 전 장관은 사퇴하면서 ‘온 가족이 만신창이가 돼 개인적으로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밝히며 동정 여론을 자극했다. 그의 부인은 구속 전 페이스북에 박노해시인의 시를 올리며 ‘감사하다’고 적었다. 어느 작가는 이 사태를 ‘가족 인질극’이라고 호도한다. 증거와 논리로 변명하지 못하자 문학적 표현으로 분위기를 몰아가려 한다.

이런 시도가 효과를 보는지 ‘검찰 개혁이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양’이나 ‘무고하게 고통 받는 힘없는 가족들’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악뮤의 상식에 비추어보면 새로운 노래 제목이 떠오른다. ‘어떻게 거짓까지 사랑하겠어, 정말로 정의로운 줄 알았던 거지’. 환상적인 빛을 뽐내던 붉은 낙엽도 자연의 순리대로 떨어져 거리에 뒹군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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