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바싹 마른 잎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람에 휩쓸린다. 잎들은 말라 가면서 점점 더 맑아진다. 표정도 맑아지고 소리도 맑아진다. 말라 가며 맑아지는 것은 잎들만이 아니다. 홀가분히 고개 든 억새들도 더욱 맑게 바람에 사각거린다. 사물이 청정(淸淨)한 본성을 드러내는 겨울의 문턱이다.

‘휘게(hygge)’는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다. 아무 말 없이 안온(安穩)한 기분에 휩싸인 감정을 덴마크 사람들은 ‘휘게(hygge)‘라고 표현한다. 휘게라는 감정에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크게 작용하는데, 옥시토신은 우리가 신뢰하는 누군가와 포옹을 하거나 혹은 안락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분비된다. 그래서 ‘사랑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다. (마이크 버킹, Hygge life, 위즈덤하우스 2016).

휘게에 합당한 우리말 단어는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언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반영한다. 특히 단어는 개념의 씨앗이며 단어를 통해 개념이 구체화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 감정을 사랑이라 느낄 수 있을까? 감정개념이 없으면 그 감정을 경험 또는 지각할 수 없다. 감정을 표상(表象)시키는 것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새로운 감정단어를 획득함으로써 그 감정을 경험하고 지각한다(리사 F.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생각연구소 2017).

휘게는 우리가 새로이 습득해야 할 감정단어다. 다양한 감정단어를 습득한 사람일수록 감정입자도가 높다. 감정입자도가 높을수록 감정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훨씬 건강하다는 것이 의학계의 정설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휘게’라는 감정을 자주 경험해야 한다. 휘게는 새것 보다는 익숙한 것, 화려함보다는 간소한 것,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 휘게는 가장 단순한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며 거의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는다. 휘게는 미래를 꿈꾸면서도 느낄 수 있고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느낄 수 있다(마이크 버킹, Hygge life, 위즈덤하우스 2016). 그러나 ‘휘게’라는 감정단어의 습득 없이는 우리는 그 감정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모르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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