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11월은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고향. 이 고향의 맛이 시래기와 우거지에 속속들이 베는 계절이다.

…배추나 무의 쓸 데 없는 겉잎을 말린 것이 시래기라면/ 쓰레기와 시래기가 다른 게 무엇인가/ 노오란 배춧속을 감싸고 있던/ 너펄너펄 그 퍼런 잎들/ 짐승 주기는 아깝고 있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중략)…/세상에 되는 일 많지 않고 어느새/ 진입해보지도 않은 중심에서 밀려나 술을 마실 때/ 술국으로 시래기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 내가 자꾸 중심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뛰고 있을 때/ 묵묵히 시래기를 그러모아/ 한 춤 한 춤 묶는 이 있었으리라/ 허물어가는 흙벽 무너지는 서까래 밑을 오롯이 지키며/ 스스로 시래기가 된 사람들 있었으리라… ‘시래기를 위하여’(복효근)

▲ 시래기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시래기는 ‘무청이나 배추의 잎을 말린 것’이다. 무든 배추든 잎을 버리지 않고 거둬 말리면 모두 시래기라는 것이다. 울산에서는 ‘시락국’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는 시래깃국을 말한다.

우거지는 푸성귀를 다듬을 때 골라놓은 겉대, 또는 김장이나 젓갈 따위의 맨 위에 덮여 있는 품질이 낮은 부분을 말한다. 김장독의 맨 위에 덮어놓은 겉대는 쭈굴쭈굴하고 못생겼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거지상’이다. 우거지는 윗부분을 걷어낸다는 뜻의 ‘웃걷이’가 변한 말이라는 게 일반적인 설이다.

초겨울 햇볕에 바짝 말린 시래기와 우거지는 겉모습과 달리 몸에 좋은 영양분이 듬뿍 들어있다. 이 중 시래기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을 ‘갱죽(羹粥)’이라고 했다. 쌀 한줌에 시래기를 듬뿍 넣고 한참 동안 고면 양이 세배 네배까지 불었다.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갱죽’ 전문(안도현)

요즘 필자의 동네에도 집집마다 처마밑에 시래기가 매달렸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에 부자들에게는 쓰레기처럼 버림 받았던 시래기가 최근에는 상종가를 친다. 빈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는 11월말, 온 가족이 둘러앉아 훌훌 떠 먹는 갱죽 맛이 일품이다. 이재명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