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반변천을 건너 안동의 임하마을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한 여자에게 나는 열광했었다. 천생 글쟁이인 그 여자는 고향의 언어와 문화를 그대로 살려내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어머니의 ‘배추적’ 맛으로 임하를 그려냈고, 고향 아지매들의 왁자한 웃음과 애환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번쩍거리는 여름 햇살이 논 위로 가득 깔리는 모습을 웅숭깊게 묘사할 땐 내 눈도 시렸다. 그 여자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문장가’ 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임하에는 고려 초기에 건립된 그만그만한 네 기의 탑이 있다. 이쪽저쪽에서 마주보거나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석탑은 모두 논 가운데가 제 자리다. 좁은 논둑길을 지나서 얼어붙은 논바닥을 밟고 조심스럽게 다가서야 만날 수 있다. 국보도 보물도 아닌지라 크게 주목받지 못해 찾아오는 이들도 없다. 그러나 매우 오래전, 옛날 옛적부터 사방에서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임하의 덩실한 기와집 웅후 애기씨가 교실 창으로 바라보던 동삼층석탑이다. 대문을 나서면 멀리서 안기 듯 다가오던 중앙삼층석탑이다. 마실 나서는 처녀들의 밤길을 지켜주던 키 큰 오라비같은 오층석탑이다. 그리고 농부의 오랜 도반인 십이지삼층석탑이다.

▲ 안동 임하동 십이지삼층석탑

지난해 가을, 단단하고 따뜻한 문장을 써 내리던 우리 시대의 문장가는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웅후 애기씨는 가고 없는데 왈칵 그리움이 솟구쳐 탑 기행을 핑계 삼아 한 생을 더듬어보러 왔다. 온전히 그녀를 위해 탑돌이를 하고 한쪽이 떨어져 나간 탑신에 가만히 몸을 기대어 본다. 연화문 갑석을 뒤덮은 검푸른 이끼를 손으로 쓸며 지장보살을 왼다.

‘아픔은 사람을 사무치게 만든다. 그리고 사무침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든다’ 그녀의 글을 팔부중과 마주한 채 읽어 내린다. 벼리지 못해 뭉툭하고 헐렁한 내 글이 십이지삼층석탑 앞에서 또 한 번 부끄러운 날이다. 겨울 임하에서.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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