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수 울산판화협회 회원

동지(冬至)(12월22일)는 일년 중 낮 시간이 제일 짧은 날이다. 바꾸어 말하면 밤 시간이 제일 긴 날이다. 이 날부터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해(年)의 시작 날이다. 어릴 때 나의 엄마는 밖에서 놀다가 온 나를 방에 앉히고 눈을 감으라 하셨다.

그리고는 칼을 두 자루 맞대어 내 머리 위 허공을 자르면서 주문하셨다. 내 몸에 붙어있는 잡귀(雜鬼)는 이제 물러나라고 허공(虛空)을 저으셨다. 그리고는 시간을 맞추어 팥죽을 방안 구석모서리에 뿌리면서 주문을 하셨다. “이제는 물러나소 그리고 먼 데로 가소.” 팥죽 한 그릇 먹으라시면서 “새알은 나이만큼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새알이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헛나이 먹고 시근은 들지 않는다.” 하셨다. 세월은 가도 세상 읽는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겨울날 동치미에 팥죽이 맛있었다는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는 벽장 안에 든 놀이기구를 끄집어낸다. 연, 얼래, 앉은뱅이스케이트, 윷이며… 이때부터 고모 누나들과 함께 방에 둘러앉아서 윷놀이 한 기억이 난다. 긴 밤을 지내는 놀이다. 배가 출출하면 동치미 내어 그냥 먹었다. 시원한 국물과 함께. 방안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방바닥을 구웠다. 추운 줄 모르고 넘기는 겨울, 온돌 덕분이다.

우리의 한옥문화에 온돌을 빼면 속없는 만두와 같다. 온돌이 더욱 신기한 것은 오후 해 질 무렵 아궁이에 불 지피면 다음 날, 아니 그 다음 날까지 온기가 식지 않는다. 지금 장작 때는 아궁이는 많이 사라졌지만 방바닥을 데우는 방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난방 방법이다. 온수보일러 활용법이 일반적이다. 이것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침대에도 난방장치로 적용되었다. 흙침대, 돌침대가 그것이다.

설날을 넘기고 정월 대보름이 온다. 마을 청년들이 논 한가운데 달집을 지었다. 새끼줄을 달집 허리에 두르고, 달이 뜰 때면 동네사람들은 소원지(小願紙)를 새끼줄에 걸고 두 손 모아 기원한다. 그리고 노잣돈도 함께 붙인다. 동네농악대가 달집을 돌면서 한 판 논다. 마을 음악대다. 한 해는 내가 소쿠리를 들고 노잣돈을 거두어 동네 형아에게 드렸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소원지에 붙어있는 소원이 하늘로 날라 갔다. 올해도 하나의 소원을 기대하는 희망이다.

그리고 쥐불놀이다. 농사가 잘 되길 기원하려는 마음으로 그 해 길흉을 점치는 일이기도 했다. 이 행사는 쥐와 논, 밭의 해충 제거하기 위함 이기도 했다. 부럼 깨기도 했다. 이날 새벽에 호두나 잣, 밤, 은행, 땅콩 등의 딱딱한 견과류를 깨무는 것이다. 또한 정월대보름 날은 약식과 오곡밥을 먹었다. 쌀·보리·조·콩·기장 등의 다섯 가지 곡식을 말한다.

비린음식을 먹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동태에 무시래기를 넣고 매운 맛이 없는 음식을 먹은 기억이 있다. 묵은 나물로 해 먹었다. 멀지 않은 날부터 산천에는 새 나물이 나온다. 그리고 동네를 다니며 밥을 얻어먹었다. 집성촌의 다른 성을 가진 집으로 다녔다. 아홉 집 이상을 돌며 밥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오전에 마당을 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마당의 복이 나간다는 이유로 피했던 행동이다. 어른들과 함께 줄을 서서 논, 밭을 밟았다. 그동안 얼어서 떠 있는 보리뿌리를 다져주는 행사였다. 이것이 지신(地神)밟기였다. 정월대보름 행사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겨울에 지내는 제사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올 한 해를 무사이 보내고 가족과 더불어 나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행하는 행사다.

그러나 이 행사가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마을에서 누군가 선도해야 하지만, 마을대표 선거의 휴유증도 있으며, 농사로 인한 마을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지에서 정월대보름까지는 새해를 맞이하는 긴 행사였다. 박현수 울산판화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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