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스러져 멸(滅)한 겨울들판, 일월의 경과에 따른 자연현상으로는 새로운 시작의 단서는 도저히 지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운 시작을 자각하는 것은 순전히 달력(calendar)에 인쇄된 1이라는 숫자 덕분이다. 스러짐(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새해가 되어서야 비로소 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알게 되는 것이다.

시작과 끝의 경계는 나의 사고와 관념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 실재하는 모든 것은 경계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이는 쉽게 체험되지 않는다. 어둠과 밝음, 시작과 끝, 대극을 구분 짓는 선(線)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계의 선들은 나누기도 하지만 동시에 양극을 합친다. 경계의 선상에서 물과 땅이 만나고 빛과 어둠이 만난다(켄 윌버, 무경계, 정신세계사 2019).

새해 동방의 아침을 밝히는 빛은 어둠을 타고 바다를 넘어 왔다. 경계의 선은 붉었다. 일출의 동해 바다가 붉은 빛으로 다가오는 것도, 일몰의 황혼이 온통 붉게 물드는 것도 빛과 어둠을 연결하는 경계선이 붉기 때문이다.

개념과 사유가 사라진 어둠의 저편에서 빛이 다가오면 사물의 경계는 다시 살아난다. 경계의 선상에서 실루엣은 점차 뚜렷해져 이것과 저것이 구분된다. 개념과 사유, 나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내가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내가 달라지지 않았으니 세상이 달라질 리 없다(피터 러셀, 과학에서 신으로. 북 하우스 2017). 나는 다시 경계에 갇혀 허둥거린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양자론(量子論)적 세계관은 바랄 수 없는 그저 무망(無望)한 꿈이었던 것이다.

올해도 태양은 동에서 떠올랐다. 태양의 서쪽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것임에도 이것은 쉽게 체험되지 않는다.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계가 사라질 리 없고 세상이 달라질 리 없다. 나는 다시 경계에 갇혀 스스로 번뇌를 만들어 낸다.

세월이 흘러 성장할수록 나무는 나이테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성장(growth)이란 경계를 허물어 외연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키는 것임을 나무를 통해 알게 된다. 무경계의 경지는 무망한 꿈일지라도 경계의 확장은 새해 아침에 소망하는 나의 유망한 희망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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