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근자에 신흥사에서 1649년에 조성한 삼존불의 주불 복장유물 문서를 공개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는 문자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 이명훈 교수의 판독을 수용한다. 그러나 이 사기(寺記·사찰의 사사로운 기록)로써 일전 사실여부에 대해 논란을 제기한 신흥사 승려 지운과 승병 100명의 임란 의병 참전과 군량미 300석 운송을 입증할 수는 없다.

2016년 6월 2일 울산광역시 북구에서 주최한 ‘울산의 기박산성 의병결진과 임란사 심포지엄’이 열렸다. 필자와 논쟁 중인 두 연구자도 약정토론과 연구자문으로 참여했다. A, B, C 3명의 교수가 발제했는데, A교수는 기박산성 의병결진에 대해서 기존 이유수 선생의 연구를 동어반복했다. 이유수 선생의 논지가 <제월당실기>에 나오는 함월산성을 기박산성이라 비정하고, 여기서 기병한 의병과 이들의 활동의 기록을 그대로 번역한 것임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필자는 B교수의 발제를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그는 여러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입증하는 울산의병사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는 제2주제(울산지역의 임란 의병활동과 ‘기박산성 창의’ 문제)를 발제했는데, 이 논문의 제3장은 소위 ‘기박산성 창의’ 자료에 대한 검토이다. 여기의 ‘자료’는 이경연의 <제월당실기>이고, ‘검토’는 이유수 선생의 논지에 대한 반론이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① <제월당실기>의 ‘동화당기’(桐華堂記)에는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을 보고 처음 기병했다 했다. ‘용사일기’에는 그 날짜를 5월22일이라 했고, 실제로 김성일이 경상도 일대에 초유문을 낸 것은 5월 초순이다. 그런데 같은 ‘용사일록’에는 함월산성 기병일을 4월23일이라 했다. 그러므로 이 날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② ‘동화당기’에는 제월당이 기병했을 때 동지는 대장 박봉수와 김응방, 박응정, 심환, 장칭, 이덕수, 이한남과 자신 등 8명이라 했는데, ‘용사일록’에는 4명이 더 등장해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 위 8명에 장칭과 이덕수가 있는데, 이들은 의병으로는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③ 5월5일 울경 연합의병이 병영성을 공격하여 일본군 수백 명을 죽였다는 놀랄만한 전승이 다른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고, 더구나 기왕 빼앗은 병영성을 지키지 않고 그냥 산성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납득할만한 해명이 필요하다.

④ 의병이 결진했다는 함월산성을 기박산성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는 과정이 더 필요하며, 논리도 더 보강되어야 한다.

①, ②는 4월23일 기박산성 기병이 날짜와 인원이 달라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필자가 부연하면 이 기록도 <제월당실기> 이외 어느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③의 병영성 공격도 <제월당실기> 이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그 양상이 ‘납득할만한 해명이 필요하다’ 하여 사실상 부인하고 있다. ④는 함월산성이 곧 기박산성이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C교수와 한 약정토론자도 같은 뜻을 말했다.

이 비평에 따르면, 울산의병이 기박산성에서 결진하고 경주의병과 연합하여 병영성을 점령했다는 기존의 논지는 사실과 다르다. 논리의 당연한 귀결로 신흥사 승병과 군량미도 사실이 아니다.

다시 B교수의 맺음말을 들어보자.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담고있는 <제월당실기>를 비롯한 여러 실기류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더 필요하다…이미 실기의 내용 중 일부 과장되거나 윤색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이 부분을 걷어내어 실체에 다가가는 연구가 요구된다.”

이로써 <제월당실기> 단 한 곳에만 나오는 기박산성 결진과 병영성 공격, 신흥사 승병과 군량미 운송은 더 이상 인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흥사의 ‘전국 최초 승병창의’는 함부로 거론할 수 없다.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중대한 사안인데, 학계에서 이를 공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승려 지운의 충의사 합사는 그 다음에 논의할 일이다. 송수환 전 울산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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