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객원교수·철학박사

대문호 헤밍웨이는 살아 생전 투우 관람을 즐겼다. 그는 그의 책 <오후의 죽음>에서 투우가 도덕적으로 옳다는 논증을 시도한다.

그의 주장은 “투우는 내게 도덕적으로 옳다.”이며, 그가 제시한 논증은 “도덕이란 좋은 느낌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투우는 내게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이다. 즉, 그의 논증은 전제1 “도덕이란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전제2 “투우는 내게 좋은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결론 “그러므로 투우는 내게 도덕적인 것이다.”로 구성되어 있다.

과연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될까? 소위 ‘주관적 윤리 상대주의’라는 입장은 도덕적 옳고 그름을 각 개인의 취향즈음으로 생각한다. 누군가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싱겁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이때 어느 취향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취향은 각자에게 좋은 느낌을 가져다 주며,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도덕적 옳고 그름도 각개인의 취향과 같은 것일까? 주관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옳고 그름에 관한 객관적인 기준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이는 얼핏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처럼 보이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주관주의가 옳다면, 소위 쾌락형 연쇄 살인마들이 살인은 자신의 취향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 할 때 그를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 또 세계의 역사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 분명 진보를 이룩해 오고 있다. 하지만 주관주의는 이 까닭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는 취향의 문제일 수 없다. 이는 객관적인 원칙이다. 만일 이를 인정한다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주관주의를 벗어나게 된다. 우리가 화성 연쇄살인마 이춘재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이유는 단지 그런 취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이 객관적으로 옳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남호 울산대학교 철학과 객원교수·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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