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까지 가세한 매체 홍수의 시대
말과 글로 진심 전달하기 어렵지만
타인의 이야기 경청하는 자세 절실

▲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인류 최초의 문자의 하나로 수메르인들이 지금부터 5000년 전에 사용한 설형문자가 있다. 설형(楔形)이란 쐐기 모양이라는 뜻이다. 쐐기는 어떤 물체의 틈새에 박아서 그 틈을 넓히는데 이용되는 도구이다. 수메르의 문자 상당부분이 쐐기의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어서 설형문자라는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확하게 하고 이를 후일을 위한 증거로 남기기 위하여 점토판에 점과 선으로 계약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양과 밀을 빌려간 내용을 새겨서 교환함으로써 나중 분쟁의 소지를 없애었다. 점토판에 새기는 내용이 많아지고 한편으로는 기호가 반복되어 정형화되다 보니 점토판 기호는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발전하였다가 이후에는 소리를 기호로 대신하는 표음문자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수메르 기호가 600개 이상이었던 모양인데 이 문자를 가르치고 쓰기 위한 전문학교가 만들어졌고 설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무더기로 발굴되면서 당시의 사회·경제적 사정이 오늘날에도 상세히 전달된다.

문자는 인류의 발전단계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즉 인류가 원시적 생존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계기는 문자의 발명이었다. 세상의 어떤 종족이든지 말이 있어서 서로간의 소통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자의 수는 수백에 그치고 주요 문자는 십 수 종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할수록 사회가 풍족하고 소득이 높다. 세종대왕 시절 창제된 한글은 그 과학성과 편리성이 선진 문자 가운데도 으뜸으로 칭송받고 있다. 특히 지금의 IT 시대에 적합한 언어로 부각된다. 그런데 한글이 15세기에 만들어졌지만 갑오경장 이후에 정부에서 ‘國文’으로 공식적 언어로 인정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글로 된 문자생활을 한 것은 120여 년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 일제강점기 하에서는 한글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주민자치센터에서 발급하는 제적등본에는 한자와 일본의 가나로 기록된 증조부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글의 편리성으로 인하여 문자 해독률은 거의 100%에 이르고 문맹이 없어졌다고 하는데도 현재 사회는 말과 글이 서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말하고 다른 글을 쓴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 또 범위가 넓은 여러 가지 고금의 사실을 늘어놓는다든지, 혹은 여러 가지 학설을 말하여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깊고 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면 듣는 쪽에서는 말이 과장되어 있을 뿐 실용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변설이 민첩·비상하여 자질구레한 말까지 논의하고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설명할 경우에는 곧 졸렬하고 야비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자상하여 적절하기는 하지만 너무 얕아서 심오한 맛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신경을 써서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한비자, 난언 중)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활약하였던 한비자의 말이다. 그는 이 글을 통하여 유세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진심을 전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그의 말과 글이 던지는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다. 시대를 넘어서 그 가치를 보존하기 때문에 <한비자>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책과 함께 그의 이름은 빛나고 있다. 신문, 잡지, 방송 등 전통적 매체와 함께 SNS를 통한 개인방송의 수단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황 아래서도 개인의 진심을 전달하기는 쉽지 않고 정보의 옥석을 가리기 더욱 어렵게 되었다.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하다. 말과 글이 귀한 만큼 그에 합당한 내용을 담아 소중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광수 서강대 로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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